조사담(調査談)

● 2004년 6월 17일 설립 30주년 기념 단행본 〈한국갤럽의 어제와 오늘〉에서 발췌

다국적 기업의 성패는 과학적 경영마인드에 달렸다
- 박무익 한국갤럽조사연구소장, 〈나의 꿈은 글로벌 CEO〉 수록 원고

여론조사에 눈을 뜨게 해준 한 권의 책

1972년에 나는 LG전자의 전신(前身)이던 금성사에서 광고 카피라이터로 일하며 ‘안방의 태양’이란 석유난로 카피로 업계에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내가 주목했던 것은 광고 카피가 아니라 대중들의 마음이었다. 대중 심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그 무엇이었다. 분명히 어떤 힘을 갖고 있으며 잘만 파악하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그 무엇에 마음이 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대학원(서울대 경영대학원)에서 배웠던 마케팅조사 방법론을 현실에서 멋지게 써보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2년 뒤인 1974년 6월 17일, 나는 종로2가 경영빌딩 8층에 15평짜리 사무실을 빌려 ‘한국 SP(Korea Survey & Poll)’ 간판을 걸었다. 최초의 일은 금성사가 의뢰한 세탁기 시장조사였다. 개업 후 1~2년간은 일거리가 별로 없었다. 간혹 용역을 맡으면 조사 분야의 몇몇 선배들로부터 그때그때 필요한 사항을 배우며 조사를 진행했다. 학교에서 배웠던 조사 방법론을 현실에 적용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사 용역이 별로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 사회가 공급은 적은데 비해 수요가 많기 때문이었다. 무슨 제품이든 ‘없어서 못 파는’ 그런 시대였다. 예외적으로 흑백 TV, 라디오, 냉장고, 선풍기, 세탁기, 조미료, 제약 등 몇몇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경쟁이 벌어졌지만, 대다수 기업들은 시장조사라는 분야에 무지했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여론조사 전문가(Pollster)로 눈을 뜨게 된 것은 1977년 어느 날 한 친구로부터 소개받은 영어책 한 권에서 출발한다. 여론조사의 권위자이자 갤럽의 창시자인 조지 갤럽(George Gallup, 1901~1984) 박사의 〈The Sophisticated Poll Watcher's Guide〉란 책이었다.

여론조사가 민주화를 이룬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서 조사인(調査人)이라 하면 시장조사를 전문으로 하는 리서치(Market Researcher)만 존재했고, 전문적으로 여론(Poll)을 추적하는 여론조사인(Poller)은 없었다.

시장조사와 달리 여론조사(사회조사)는 표본 설정부터 까다롭다. 무작위 추출(Random Sampling)이란 개념을 적용해 전 국민의 의견을 읽어내는 방법은 미국에서 1936년부터 상용화됐지만, 우리나라에는 그 후 40년 동안 상륙하지 못한 새로운 이론이었다. 물론 언론을 통해 여론조사 형식을 빌린 기사가 간간이 나오곤 했으나, 대부분 국책 연구기관에서 정치적 목적을 갖고 발표하거나 조사 대상, 오차 범위 등 기본적인 개요조차 공개하지 않은 채 수치만 발표한 것들이었다. 한마디로 여론조사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것들이 태반이었다.

나는 조지 갤럽의 책을 통해 비로소 여론조사의 진면목을 알게 됐다. 갤럽 박사는 여론조사인으로서 겪은 체험을 간결하고도 담담하게 기록했다. 특히 민주주의를 위한 여론조사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설명은 나를 고무시켰다. 여론조사가 민주화를 이룬다! 눈이 번쩍 뜨였다.

1970년대는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길이 봉쇄된 유신체제였다. 국가가 개인의 두발이나 의상까지 관리(?)했으니 언론의 자유는 고사하고 ‘여론’ 자체가 숨죽이며 권력의 눈치를 봐야 했다. 1977년 여름이던가, 하루는 출근해보니 누군가가 북쪽으로 난 빌딩 창문을 모조리 용접하고 하얀 페인트로 칠해버렸다. 하얗게 얼굴이 질린 건물주는 ‘서울 중심가에서 청와대를 향해 난 창문들은 청와대 경호실에 의해 모두 봉쇄당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롯데호텔 창문들도 이런 식으로 폐쇄했다고 한다.
얼마 동안 사무실은 찜통이 됐다. 예의를 차릴 겨를도 없이 남자 직원들은 웃통을 벗고 달달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한 대에 의지한 채 조사 자료와 씨름해야 했다. 날마다 뜨거운 공기가 머리 위로 이글거렸다. 가수 양희은의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노랫말이 그렇게 가슴 깊이 파고들던 때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지 갤럽 박사가 책을 통해 언급한 한마디 한마디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증이 심했던 내 정신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내가 여론조사인으로 일한다면 한국을 민주화하는 데 한몫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댐의 작은 구멍을 온몸으로 막아 나라를 구했다는 네덜란드 동화 속의 ‘한스’처럼 들뜬 마음으로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다.

지금 돌아보면 조금 황당하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랬다. 나는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밑져야 본전’이란 심정으로 저자인 조지 갤럽 박사 앞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초안을 타자기로 옮긴 뒤 빨갛고 파란 줄무늬가 둘러쳐진 항공봉투에 정성스럽게 접어 넣었다.

내용인즉 ‘당신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할 테니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거절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에 조마조마했다. 주위 사람들은 내게 저작권료가 꽤 비쌀 것이라는 둥 한국 실정에 도저히 맞지 않을 것이라는 둥 도움이 안 되는 얘기들만 했다. 얼마 뒤 기다리던 답장을 받았다. 갤럽 박사는 내게 저작권에 대한 요구는커녕, 책이 번역되면 한국어판을 몇 권 받고 싶다고 격려해주었다. 주위의 비웃음을 깨끗이 불식시키는 내용이었다.

세계 최대의 조사기구 갤럽 인터내셔널

내가 번역한 그 책의 제목은 〈갤럽의 여론조사〉였다. 이 책은 지금도 개정판을 내고 있을 만큼 여론조사 연구자들에겐 필독서가 됐다. 당시 나는 번역된 책 열 권을 정성스럽게 포장해 저자에게 우송했다. 얼마 뒤 그가 답장을 보내왔는데, 거기에는 ‘갤럽 인터내셔널(Gallup International)’이란 국제 조직이 있으니 입회원서를 내고 회의에 참가해보라는 구절이 들어 있었다.

편지를 읽는 순간 나는 ‘이제 여론조사를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됐다’는 기쁨과 ‘나도 여론조사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는 환희에 빠졌다. 나의 조사 인생은 시장조사라는 작은 강에서 출발했으나 이제부터 여론조사라는 망망대해로 항해하게 될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갤럽 인터내셔널은 ‘조사를 통한 사회 발전과 조사 기법의 개발’이란 슬로건 아래 1947년 5월 창립된 세계 최대의 국제 조사 기구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1개국에 1개 조사회사만 가입할 수 있다
둘째, 회원의 위치는 오늘날 국제연합(UN)처럼 상호 독립적이다. 즉 어느 한 회사의 자본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다.
셋째, 연차회의는 해마다 국가를 바꿔가며 개최하고, 새로 개발된 조사 기법을 소개하고 각국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발표하여 조사 방법의 발전을 이룩한다.
넷째, 조사를 통해 인류에 기여한다는 사명감을 잊지 않는다.

이 정신에 따라 갤럽 인터내셔널은 50여 년 전부터 매년 ‘연말 정기 여론조사(End Year Poll)’라는 이름의 조사를 하고 있다. 매년 말 갤럽 회원국은 자국민을 대상으로 새해의 경기 전망, 노사 관계, 세계 평화 등에 관한 내용을 조사하여 신년 초가 되면 언론에 발표한다. 질문 내용은 회원국 어디나 동일하기 때문에 국가별, 대륙별 비교가 가능하다. 또한 조사가 해마다 실시되기 때문에 추세 분석도 할 수 있다.

갤럽 인터내셔널은 개별 이슈에 관한 조사도 1년에 한두 차례 실시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인간 가치관 조사(전 세계 시민들의 의식과 가치관을 비교한 조사), 에이즈에 관한 인식 조사, 유엔의 활동 평가,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및 이라크 전쟁 등을 꼽을 수 있다.

한국은 정치 여론조사가 가능한 풍토인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보자.
1978년 초, 나는 갤럽 박사의 충고대로 갤럽 인터내셔널에 입회원서를 냈다. 그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노먼 웹과 일본 갤럽의 멤버였던 니키 고오지(二本宏二) 두 사람이 한국을 방문해 내가 운영하던 ‘한국 SP’를 점검했다. 그들은 우리가 만든 각종 질문지의 수준과 질을 살펴보았고 분석 과정의 통계적 방법들이 제대로 적용되고 있는지 검토했다.

‘조사’라는 분야의 성격상 한국에서 조사기관을 운영하더라도 서구식 합리주의가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조사 방법으론 자체가 구미(歐美)에서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갤럽 인터내셔널에 가입하는데 유리한 상황을 제공해 주었다. 미국과 소련의 대결로 상징되던 냉전 시절에는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두 사람은 우리 회사가 국제 기준을 따르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가입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 것이다.

편지만 주고받았던 조지 갤럽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79년 5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갤럽 인터내셔널 국제회의에서였다. 그는 훤칠한 키에 80세에 가까운 동안(童顔)의 노인으로, 부인의 부축을 받고 있었지만 얼굴엔 미소를 가득 머금은 인자한 모습이었다. 그와 악수를 나눌 때 잡은 손이 무척 컸다는 것과, 인사하려고 고개를 숙였을 때 본 그의 구두가 아주 컸다는 기억이 난다.

나는 그에게 신라시대의 모조 금관(金冠)을 선물하면서 ‘백과사전에는 당신의 이름이 여론조사의 대명사처럼 기록돼 있다. 이 금관이 조사계(界)의 왕에게 어울리는 선물이면 좋겠다’고 인사했다. 그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기뻐했다. 첫 대면에서 그는 몇 가지 심각한 질문을 내게 던졌다. 그 중 가장 난감했던 것은 다음의 질문이었다.
“무익, 한국은 정치 여론조사가 가능한 풍토인가?”
유신 말기에 정치 여론조사라니,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은 한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여기엔 뭐 하러 가입하려 하느냐’며 따져 물을 터였다. 나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 정치 여론조사 말이죠... 점진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 하구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왠지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그 시절을 ‘역사 발전의 피치 못했던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당시 국제무대에서 뛰어야 했던 한국인에게 조국은 ‘부끄러운 부담’이기도 한 것이 사실이었다. 갤럽 박사는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내 어깨를 토닥거리며 “지구상에 한국과 같은 나라는 너무나 많아. 무익, 자네는 큰 짐을 지게 된 거야”라고 격려해주었다. 그때의 찡했던 감격은 평생 잊을 수 없다.

15대 대선에서 0.4%의 오차로 당선자 예측

1979년에 나는 갤럽 인터내셔널 한국 대표로 가입할 수 있었다. 조지 갤럽 박사는 나에게 갤럽의 브랜드를 사용해도 좋다며 이를 자필 서명으로 기록에 남겼다. 덕분에 한국 SP는 ‘한국갤럽조사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까지 갤럽 인터내셔널 국제회의는 꾸준히 개최되고 있다. 지난 1995년 대회는 한국갤럽 주최로 서울에서 열렸는데 전 세계 40여 개국 회원사가 참석했다. 나 역시 1979년부터 2003년까지 25회에 걸쳐 이 행사에 꼬박꼬박 참석하면서 어느 다국적 기업 못지않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경험했다.

갤럽 인터내셔널의 멤버들은 모(母)기업과 자(子)회사의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 흥미롭다. 이 조직은 유엔처럼 각각의 회원사들이 여론조사인의 입장에서 모인 이념체(理念體)와 유사하다. 그 이념은 여론조사가 사회를 합리화·민주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들은 내게 선거조사와 마케팅조사의 각종 기법들을 소개해주었다.

그 결과 나는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내 최초로 선거 예측 조사를 발표했고, 그 정확성을 국내외에서 인정받았다. 특히 1997년 제15대 대선에서는 0.4%의 오차로 당선자를 예측해 갤럽 인터내셔널의 회원사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최초의 선거 예측 조사 발표는 정치, 행정, 경영 일선에 합리화 바람을 불게 했다. 그때까지 주먹구구식 의사결정으로 일관해 온 관료집단과 기업들이 여론조사와 시장조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감(感)과 선동에 의존하던 선거 풍토는 유권자 조사에 의한 정책중심으로 바뀌었다. 밀어붙이기식 행정도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쪽으로 바뀌어 오늘날에는 ‘시민 만족도 조사’ 등을 구청 단위로 이용하고 있다. 특히 서울시청은 한국갤럽과 함께 부패지수를 조사해 발표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기업의 변화는 더욱 두드러진다. 1987년 이후 한국갤럽의 조사 매출은 연 40% 이상 증가해왔다. 기업들이 주먹구구식의 의사결정에서 탈피하여 과학적 경영을 위한 각종 마케팅조사를 활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갤럽의 이름은 우리 국민의 70%가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치 여론조사 기관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치 여론조사 비중은 전체 매출의 15%에 불과하고 나머지 85%는 마케팅조사가 차지한다. 많은 국내외기업들이 갤럽을 이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문화의 차이를 이해해야 성공한다

다국적 기업은 모기업이 세계 각지에 자회사나 자사 혹은 합병회사를 확보하고 생산과 판매 활동을 국제적 규모로 수행한다. 그 점에서 나는 다국적 기업을 포함한 국내 기업들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위해 ‘사실 확인(Fact Finding)’을 해주는 조사인이다. 이 과정에서 다국적 기업과 국내 기업들을 체험할 기회가 많았다.

현지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의 지사장은 모기업의 문화에 동화되기 쉽다. 다국적 기업의 모국이 미국이라면 한국 지사의 기업문화도 미국식으로, 일본이라면 일본식으로 조성된다. 다국적 기업들이 국내의 기반 조성에 실패하는 원인은 비슷하다. 대표적인 이유는 ‘현지화(現地化, Localization)의 실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지화’란 ‘문화적 차별성에서 발생하는 쟁점들의 소화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인과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매우 다르다. 의사결정의 경우 서양인은 이성에, 한국인은 감정에 크게 좌우된다. 서양인들의 업무 처리에는 사적(私的) 관계가 중요하지 않지만, 한국인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다. 특히 의사결정 과정에서 서양인은 사실을 추구하는 반면, 한국인은 종종 가정과 추측을 따르고 사실을 중시하지 않는다.

갤럽의 조사 과정에서도 문화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질문 문항에 사용하는 ‘5점 척도(Five Scale)’의 경우, 영미권에서는 ① 매우 동의(Completely Agree) ② 어느 정도 동의(Somewhat Agree) ③ 동의도 비(非)동의도 아님(Neither) ④ 비동의(Somewhat Disagree) ⑤ 매우 비동의(Completely Disagree)로 구성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런 문항으로 조사하면 데이터는 실제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한국인들에게 ‘동의’라는 언어는 식자층에서만 통하는 문어체에 가깝고 대화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하려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로 바꿔야 한다. 이 경우 제대로 된 결과를 얻으려면 ① 매우 그렇다 ② 어느 정도 그렇다 ③ 그저 그렇다 ④ 별로 그렇지 않다 ⑤ 전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바꿔야 한다.

단순한 질문에도 이 정도로 문화의 차이가 숨어 있다. 경영자가 이를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모기업의 경영문화를 한국에 이식하려 한다면 실패하기 쉽다. 모국에서 파견된 일부 다국적 기업 경영자는 현지인들에게 ‘내가 너희들보다 많이 안다’는 오만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심지어 조사기관에서조차 자신들이 작성한 질문지를 그대로 사용하라고 요구한다. 한 사람을 면접조사하는 데 한 시간이나 걸리는 질문지를 들이밀고 이대로 조사해달라고 요구해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한국인들은 직감적이라 전화 조사의 경우 10분, 면접 조사의 경우 20분이 지나면 조사의 품질이 떨어진다고 설명해도 소용없다.

그런 다국적 기업은 십중팔구 현지인과의 파트너십을 형성하지 못하고 상호 불신하는 가운데 문화적 갈등을 겪다가 철수하곤 한다. 특히 외국인 지사장들은 현지 문화를 익힐 시간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마케팅 전략을 수립해서 시행하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이 같은 장애를 극복한 외국인 지사장도 없지 않지만, 실제로는 현지인을 지사장으로 고용하는 다국적 기업이 성공 확률이 높다. 결론적으로 다국적 기업의 성패는 현지화에 달렸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경영의 기본 원리는 계획-실행-평가

같은 다국적 기업이라 해도 한국적 문화와 정서를 존중하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과학적 경영(Scientific Management) 방식을 잘 접목하는 회사는 성공한다. 그들은 의사 결정에 필요한 사항들을 사실(Fact)로 간주하고 그것을 수집하는 데 성실하다. 시장 구조나 소비자 행태 혹은 지역별 라이프스타일까지 가능한 모든 것들을 숫자로 바꿔놓으려는 과학자와 다름없다.

다국적 기업의 광고 예산은 연간 수십 억 원에서 수백 억 원에 이른다. 그 가운데 3~4%를 광고 효과 조사 비용으로 책정해둔다. 광고가 집행된 지 6개월쯤 후 그들은 그 광고가 매출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기업 이미지 상승에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등을 알아내기 위해 광고 효과 조사를 의뢰한다. 객관성 확보를 위해 의뢰처는 광고 대행사와 관계가 없는 독립된 조사기관을 선정한다.

국내 기업의 사례를 들어보자. 우리나라 100대 광고주들 가운데 제작이 완료된 CF를 방영 전에 테스트하는 기업은 20%에 불과하다. 광고주가 신문 광고안을 결제하거나 CF 시사회를 할 때 그 광고가 소비자 혹은 타깃 집단에게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지 보여주는 조사 자료는 거의 없다. 단지 몇몇 사람들 사이에 형용사나 부사(‘끝내주는’, ‘확실한’, ‘뭔가 매력적인’ 등등)가 오가면서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03년 우리나라 광고 시장 규모는 7조 원을 넘어설 정도로 양적 성장을 했고 국제적 위상도 높아졌다. 하지만 광고의 과학화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자문해보면 얼굴이 붉어질 정도다. 한국갤럽의 자료에 따르면, 기업들의 광고 효과 조사비는 광고비의 0.5%도 안 된다. 왜 그런 것일까?

광고주의 대부분이 광고 대행사로부터 서비스 차원에서 저가(低價)나 무료로 광고 효과 조사 결과를 받아보기 때문이다. 자사(自社)가 제작한 광고가 최고라고 프레젠테이션을 했던 광고회사로부터 “미안하지만 저희가 제작한 광고가 매출에 기여하지 못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라는 대답을 받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경영의 기본 원리가 “계획하고(Plan) 실행하고(Do) 평가하는(See)’ 것이라면 우리나라의 이 같은 실태는 경영 부재(不在)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CF가 제시간에 방영됐는지, 신문의 정해진 게재면에 제대로 실렸는지 등과 같은 사소한 사항은 철저하게 체크하면서 몇 백억 원을 허공에 날려버릴 수 있는 광고 그 자체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린다. 광고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보고하라는 최고경영자들도 거의 없다.

몇 년 전 미국에서 개최된 ‘리서치 엑스포(Research Expo)’에 참관했을 때였다. 각종 조사 프로그램이 선보였는데 가장 관심을 근 것은 새로 개발된 광고 효과 측정 프로그램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부스에 몰린 관객들 대다수가 광고회사가 아닌 일반 기업의 광고 담당 직원들이란 사실이었다. 과학적인 광고 관리를 위해 새 기업에 관심을 기울이는 그들을 보면 우리 기업들의 낙후된 경영 마인드가 확인되고, 과연 그런 기업들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과학적 경영, 시장조사를 중시하라

하지만 한국에서도 벤치마킹할 기업들이 있다. 2003년 6월 미국의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 위크〉는 세계 100대 IT 기업을 선정하며 삼성전자를 세계 3위로 발표했다. 그 밖에 SK텔레콤이 44위, LG전자가 67위, KTF가 71위로 순위에 올랐다. 몇 년 전 국내 핸드폰 시작이 개방되자 이 기업들은 세계 1위의 핸드폰 메이커 노키아와 그에 버금가는 모토로라를 맞아 시장 쟁탈전을 벌였다. 결과는 한국인의 속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응한 국내 기업들의 승리였다.

그들은 어떻게 성공한 것일까? 단순히 IT 기술 때문만은 아니다. 단적인 예로 1990년대 말에 유행했던 벤처기업들을 보자. 시장에서 얼마나 상품이 팔릴 수 있을지 조사 한번 하지 않고 기술적 특징 하나만으로 자금을 끌어 모았다. 그 결과 수천 명의 투자자를 가난하게 만들고 사라졌다. 대통령부터 ‘벤처란 여러 업체들이 망하는 가운데 독특한 기업 한두 개가 성공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국민들에게 설명했으니 예견된 비극이었다.

성공하는 기업들은 과학적 경영 마인드를 고수하고 시장조사를 중시한다. 예컨대 삼성전자는 최근에 ‘벽걸이형 TV’라고 불리는 ‘PDP(Plasma Display Panel) TV’를 개발했다. PDP 기술은 가스의 플라즈마(기체가 이온화되어 중성으로 변한 상태) 현상을 이용해 대형 평면 화면을 구현한 것으로 차세대 TV의 주역이다.

삼성은 개발 직전 미국과 유럽 3개국을 대상으로 면밀한 시장조사를 진행했다. 국가별 주거문화와 라이프스타일, 구매 계층 등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국의 경우는 방 구조가 넓어 벽걸이형 TV를 선호하지만 영국은 방이 좁고 주택들이 오래되어 TV를 가구 위에 놓아둔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과학적 경영의 한 예다.

10년 후 세계 100대 기업 중에 한국기업은 얼마나 될까? 그것은 마케팅조사를 통해 사실을 철저히 확인하고 가치 있는 정보를 선별하여 각 국가별 현지화 전략을 면밀히 수립하는 데 달려 있을 것이다. 앞으로 국내에서도 과학적 경영 마인드로 무작한 경영자들이 대거 등장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