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6월 17일 설립 30주년 기념 단행본 〈한국갤럽의 어제와 오늘〉에서 발췌
좋은 인연(因緣)
- 이계오 한국갤럽 자문교수
상큼했던 기억
내가 박무익 소장을 처음 만난 것은 지금부터 10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한국조사통계연구회 회장으로 ‘비표본오차(nonsampling error) 워크숍’을 열면서 한국갤럽 박무익 소장을 초청하기로 했다. 이 때문에 갤럽의 옛 건물인 고려빌딩으로 찾아가 박 소장을 직접 만난 일이 있었다.
그때 받은 첫 인상은 조사회사의 경영자답지 않은 매우 소탈하고 직설적인 분이란 느낌이었다. 보통은 조사회사든 문화사업을 하는 언론사나 출판사의 경영인들은 그들 나름의 사업 감각을 키운 덕분에 공통적인 인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박무익 소장만은 그 범주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다. 조사회사를 세워 경영해 왔고 지난 1987년 대통령 선거예측조사를 발표한 이래 우리나라 정치여론조사의 막을 올린 주인공인데, 막상 만나보니 ‘아 저런 분도 계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민적인 풍모에 유머러스한 표현을 즐기는, 무척 인간적이란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상큼하다고나 할까, 하여간 그 사무실을 나올 때 마음이 아주 가벼웠던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그 이후에 만남이 다시 이어진 것은 1999년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공군사관학교 교수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서울대학교 홍두승 교수와 조사연구학회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세미나를 개회할 때면 어김없이 박무익 소장이 참석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조사회사 경영자가 몸소 나타나 세미나를 경청하고 뒤풀이 때면 학자들과 어울려서 흥겨운 가무와 토론을 이끌기도 했다. 학자들과의 이러한 어울림은 그렇지 않아도 거리감이 많았던 학계와 재계 간의 다리가 되어 주고 있어 무척 반가웠다. 그러던 중 통계학과를 포함한 각 분야의 교수들이 작당(?)해서 1999년 11월 13일, 한국조사연구학회를 창립하게 됐다. 초대회장은 홍두승 교수. 이듬해인 2000년 3월 23일, 사회조사의 과학성을 제고하고 건전한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하여 조사윤리강령을 제정했다.
이 무렵부터 학계와 조사업계 및 관계(官界) 간에는 긴밀한 유대관계가 본격화됐다. 특히 박무익 소장과 한국조사연구학회 간의 깊은 인연이 시작됐다. 나는 조사연구학회 이사로 박무익 소장을 추천했고, 박 소장은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여 주셨다. 조사연구학회의 모든 회원들도 반겼다. 특히 2001년 8월에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통계인대회(International Statistical Institute)는 100여 국에서 2400여 명의 통계인들이 참가하여 상호 정보교류와 친목을 도모하는 통계인들의 축제였다. 세계적인 조사통계분야의 석학들을 초청하여 튜토리얼 워크숍을 운영하는데, 이에 필요한 경비는 KOSOMAR 회원사들이 후원하기로 돼 있었다. 이때에도 박무익 소장은 누구보다 솔선수범해 많은 통계학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2002년 초에는 한국갤럽 6본부 연구원들이 한국전산원의 정보화 통계를 위한 표본조사를 하던 중 내가 이 내용으로 한국전산원에서 강의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거 참석했었다. 젊고 혈기왕성한 통계 후배들은 강의가 끝난 뒤에도 나를 찾아와 표본설계와 관련한 이론을 꼬치꼬치 물어보며 관심을 보였다. 내가 아는 범주 안에서 이들에게 도움을 주며 이들과의 만남을 지속하던 그 해 5월, 박무익 소장은 내게 전화로 다음과 같이 제의했다. “곧 정년퇴직하시지요? 축하드리고요, 혹시 다른 계획이 없으면 우리 갤럽에 오셔서 연구원들에게 전문적인 통계 지식을 보충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그해 7월 31일자로 나는 정년을 맞아 30년간 근무했던 공군사관학교를 떠나야 했는데, 우연처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나타난 셈이었다. 공사 생도 시절 전투기를 모는 파일럿의 꿈을 시력 문제로 접은 뒤로는 통계학 분야 중 표본설계를 전공해 반평생을 통계학자로 살아 온 나로서는 한국갤럽의 제의에 적이 기뻤다. 그렇지 않아도 국내 조사회사는 교과서적인 이론을 자주 벗어나고 있어 제대로 배운 내가 언젠가는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던 때였다. 내가 공부한 것을 사회로 돌려줄 수 있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박무익 소장으로 인해 생겼다는 점에서 반가웠다. 10년 전의 인연이 이어져 갤럽의 자문교수가 된 것이다.
조사에 대한 애정의 결정판, ‘한국갤럽 학술논문상’
갤럽에 입사한 지 1년 10개월 동안 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일을 꼽으라면 다름 아닌 ‘한국갤럽 학술논문상’ 제정일 것이다. 무엇보다 박 소장의 조사통계 연구 분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결정판이 바로 이 상의 제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평소 박 소장의 지론은 “우리나라 조사통계 연구 분야의 확고한 발전을 위해서는 우수한 조사전문인력의 양성과 조사연구 분야의 방법론에 대한 창의적인 연구개발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기실, 이처럼 돈 안 드는 덕담이야 관련 분야를 조금만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내용이다. 80개가 넘는 조사회사들 중에서 한국갤럽은 이 대목에서도 남달랐다. 박무익 소장은 2003년 7월, 한국조사연구학회를 통해 5억 원이라는 거액의 재원을 제공하고 매년 1억 원씩 기부하기로 하면서 한국갤럽학술논문상을 운영하게 하셨다. 거액을 출연하는 과정을 지켜 본 나로서는 말이 쉽지 행동으로 옮기기엔 대단히 어려운 결정을 흔쾌히 하신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한국갤럽학술논문상의 운영과 전망은 어떨까? 이 지면을 빌어 한번 소개해 보고자 한다. 한국갤럽학술논문상의 제정 취지는 박무익 소장님의 평소 지론을 모체로 하여 다음과 같이 정했다. ‘우리나라 조사연구 분야의 발전을 도모하고 조사를 바탕으로 한 과학적인 접근을 통하여 지식정보 사회로 나아가도록 기여하는 데 있다.’
심사대상 분야는 조사연구관련 분야인 조사 방법으론, 응용사회과학 및 경영학으로 구분하여 연구논문공모와 심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여타 학술논문상과 차별화를 위해서 최우수상을 ‘한국갤럽상’이라 명하고 상금은 1,000만 원으로 하여 연구자들의 관심과 동기부여를 유도하고자 했다.
한국조사연구학회에서는 한국갤럽학술상의 원활한 운영과 공정한 심사를 위해서 서울대 사회학과 홍두승 교수를 운영위원장으로 위촉하고 분야별 책임 운영위원으로 조사 방법으론 허명희 교수(고려대 통계학과), 응용사회과학 김두섭 교수(한양대 사회학과), 경영학 한상린 교수(한양대 경영학과)를 위촉하였으며 기금관리와 행정업무의 총괄을 위해 총무이사로 김주영 교수(국민대 경영학과)를 선임했다.
심사대상으로 삼은 논문은 2002년 1월부터 12월까지 전문학술지에 발표된 조사연구관련 논문이며 전문학술지는 ① 학술진흥재단의 등재, 등재 후보, A급, B급 학술지 및 이와 동등한 수준의 2인 이상의 심사위원이 있는 국내학술지와 ② SSCI, SCI등재 및 이와 동등한 수준의 국외학술지로 정의했다. 심사할 논문의 공모는 2003년 6월 1일부터 2003년 7월 31일까지였으며, 실제 심사대상이 된 논문은 심사위원의 추천논문을 포함하여 59편이었다.
논문공모를 위해서 조선일보와 교수신문에 광고를 게재하고 전국 200여 개의 대학과 연구기관에 한국갤럽학술논문상의 공모 건으로 공문을 발송하였을 뿐 아니라 유관 학회에 이메일전파를 통해서 공지했다. 반응은 기대한 만큼에 미치지 못했지만 심사위원들의 추천으로 논문의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
공모된 60여 편의 논문은 3개 분야로 나누어 해당학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3단계의 심사과정을 거쳐서 최우수작 1편과 우수논문 7편을 선정하였고 한국갤럽상인 최우수작에는 이학식 교수(홍익대 경영학과)와 임지훈의 ‘소비감정 척도의 개발’ 논문을 선정하여 상금 1,000만 원과 상패를 수여하였다. 제1회 시상식은 2003년 9월 18일 서울대학교 호암컨벤션센터에서 200여 명이 참석하여 최우수 논문의 발표와 만찬을 갖는 행사로 성황리에 열렸다.
제2회부터 한국갤럽학술논문상에는 ‘한국갤럽학위논문상’이 추가되었다. 취지는 대학원생들의 조사 방법론에 대한 연구 활성화에 있었다. 이번에 공모된 논문은 학술논문 49편과 학위논문 18편으로 현재 심사가 진행 중이며 시상식은 한국갤럽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로 치르기 위해서 6월 19일에 서울대학교에서 가질 예정이다.
지금까지 2회에 걸쳐 한국갤럽학술논문상을 운영하면서 느낀 점이라면 조사 방법의 개발연구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수량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분야의 교수들이 한국갤럽학술상의 제정취지를 이해하였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앞으로 조사 방법의 연구개발을 활성화할 수 있는 연구기반조성에 영향을 줄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의 한국갤럽학술상이나 학위논문상은 이미 연구되어 발표된 논문을 심사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조사 방법의 개발연구에 기여하는 바가 가시적으로 크게 나타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효과를 줄 수 있는 한국갤럽학술상 운영방안에 대한 연구와 고민은 지속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나라 조사역사에 박무익 소장이 음양으로 끼친 영향은, 특히 조사연구학회의 은인(恩人)으로서 절대 과소평가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해 둔다.
좋은 인연으로 좋은 결실 맺게 되길
2002년 8월 무더운 여름날에 한국갤럽의 현관을 들어섰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이 다 되어 간다. 30여 년을 사관생도들과 함께 숨 쉬며 틀에 짜인 생활에 배인 내가 한국갤럽에 들어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설문지들로 뒤범벅이던 7층의 전산실이었다. 전화조사 또는 면접조사를 통해 모아진 응답들이 코딩실을 거쳐서 디지털화되는 출발점이 전산실이며, 여기서 입력된 데이터들이 가공을 거쳐 다양한 형태의 통계를 생산하므로 통계정보로서의 시작점도 전산실이다. 이곳이야말로 통계정보의 정확성이나 신뢰성을 보증하는 첫 공정인 셈이다. 통계학 교수로 공군사관학교 전산실에서 30여 년간의 생활을 마감하고 사회인으로 첫 발을 한국갤럽의 전산실에서 하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 같다. 모두 박무익 소장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나와 박무익 소장은 전생에 아주 가까웠던 사이가 아니었나 싶다. 한국갤럽이 3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도 한국조사연구학회와 나, 그리고 박무익 소장과 한국갤럽학술논문상과의 인연은 이렇게 깊어가고 있다.
2년 전 한국갤럽에 첫 발을 들여 놓을 때와 지금의 여건을 비교해보면 외적인 면에서는 리모델링이라는 작업을 통해 건물과 근무여건이 선진국 수준으로 개선되었다. 하지만 내적 측면에서는 괄목할 만한 발전이나 성장이 있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본다. 한국갤럽학술논문상과 학위논문상이 우리나라의 조사통계 연구 분야의 발전과 조사 방법의 수준향상에 기여할 것을 기대하는 바와 같이, 한국갤럽의 내적 측면도 과감한 변화와 개선을 통해서 지금까지 우리나라 조사업계에서 한국갤럽이 누려왔던 명성을 지속시킬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한국갤럽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자기반성과 혁신하는 계기를 이번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화두로 가졌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좋은 인연으로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결실을 맺기 위해 나는 조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