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담(調査談)

● 1999년 6월 17일 설립 25주년 기념 단행본 〈한국갤럽의 어제와 오늘〉에서 발췌

내 강의의 ‘약방의 감초’
- 심재룡 서울대 철학과 교수

박무익 소장과 나는 대학 동창 관계다. 그렇다고 보통의 덤덤한 동창 선후배 사이가 아니다. 대학시절 청운의 꿈을 실어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던 비밀결사 비슷한 두레 모임의 단골이다. 그 당시 모임의 장소로 성북동에 있던 대성산업 김영대 부회장의 별채를 이용하였다. 어찌어찌 시간강사로 일년을 연명하던 귀국 초기부터 아내가 김 부회장의 비서 자리를 지키면서 나보다도 박 소장과 더 자주 통화를 했다. 게다가 지금은 아내들도 두레모임에 동석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 이래저래 박 소장과는 학연에 덧보태어 여러 가지 다른 인연도 깊은 편이다.

지금도 가끔 졸업 시절에 찍은 사진을 꺼내 본다. 패기만만한 얼굴들. 누구나 그렇겠지만 1960년대 아직도 절대 빈곤의 티를 벗어나지 못한 암울한 시대를 살던 우리 젊은이들은 시절인연에 따라 나라를 들어먹는 궁리를 자주 했다. 그래서 우스개로 ‘비밀결사’라 했다.

요즘도 심심치 않게 두레가 모인다. 모두 자기 자리에서 당찬 역할을 담당하는 일꾼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나라를 들어먹을’ 궁리 대신 건강문제, 자녀문제로 담소를 나눈다. 특히 연말연시 두레 모임에서는 박 소장이 예쁘게 디자인 한 <End of Year Poll> 카드에 담긴 그 해의 국가 살림살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더욱이 그 양반의 어색한 몸가짐과 어눌한 말솜씨로 펼치는 농담은 그 자리에 빼놓을 수 없는 메뉴 중 하나다.

사적 관계를 떠나서 나는 박 소장과 두 번에 걸쳐서 직접 여론조사에 참가했다. 한국인의 종교의식 조사를 동료 윤이홈 교수와 함께 진행한 적이 있다. 한참 현대화를 잣대로 여느 나라 시민들의 의식을 가늠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당시 ‘케케묵은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모교에서 강의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받은 학위 제목과는 달리 한국에서 학창시절에 사사한 윤리학자 우송 김태길 교수와 열암 박종홍 스승들의 영향으로 현실과 철학을 접목하려는 나의 학문적 열정은 여전했다. 아예 현실 개조에까지 관여하게 되었다. 시국 선언에 동참하여 개발 독재의 연장에 있던 군부 독재의 말기 증상에 반기를 들면 철학과가 몽땅 폐과되지 않겠느냐는 박 소장의 걱정스런 전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무튼 나는 동양철학 가운데서도 마음자리를 닦아나가는 선 불교를 학원 강단에서 강의하는 것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특히 선 불교라는 종교 철학은 단순한 종교요 철학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장 현실에 실천을 강조하는 터였다. 자유와 창조의 인간, 슬기롭고 자비로운 인간의 형성과 발현은 지금 이 자리 역사의 한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초역사적 질문과 논의가 소위 강단 철학이라는 명목으로 역사의 마당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후세의 준엄한 심판을 어찌 견딜 것인가?

학자가 상아탑에서 고고한 묘고정상(妙高頂上)을 지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소치이다. 플라톤이 이상국가를 세우려는 염원에서 거센 파도에 목숨을 걸고 폭군의 압제를 비판 제거하려 했다. 공자께서 평생을 ‘상갓집 개’라는 모멸의 소리를 들어가며 주유천하(周遊天下)했다.

공화국의 이상을 승가사회의 모델로 삼은 석가모니의 유지를 받들어 대승불교의 창조주인 인도의 용수는 임금을 간하며 백성을 깨우치는 사회 윤리적 교설을 펼친다. 대승불교의 현학적 담론을 뛰어 넘어 중국인들은 이를 현실에 직접 적용하려는 활발한 선을 개발한다. 특히 임제는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살덩어리 인간의 진면목을 바로 보라, 바로 행동하라’ 말했다.

금나라에 금덩어리를 갖다 바쳐 겨우 독립을 유지하던 송나라 사대부들에게 경종을 울린 임제 선사의 피를 이어받은 한국 선 불교는 조선조 오백 년의 억불(抑佛)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경허 선사의 사자후로 잠에서 깨어 이제 기독교의 경쟁적 선교에 맞서 당당히 현실 개혁과 인간 구제의 대도를 걷고 있다.

이미 80년대 말 우리가 수행한 한국갤럽의 ‘한국인 종교의식’ 조사는 성직자들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 지금도 그 진단은 정확하다. 시민들의 의식은 열린 사회, 공평한 사회를 지향하고 특히 불교도들은 천하에 열린 승가를 희구하는데 몇몇 권승(權僧)들은 승가를 마치 가족 연대적 폐쇄적 이익사회로 인식하고 있다. 특히 기초교육이 모자라는 출가승단의 비리 승려들의 그 작태는 가히 정치판을 뺨치는 활극무대를 연출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은 내 강의에 약방의 감초로 등장한다. 한국갤럽 조사의 신빙성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역대 선거의 정확한 예측에 힘입어 학생들은 내 강의에서 현실성을 직감한다. 철학자는 감히 이렇게 현실에 참여한다. 그 뒤로 사회조사라는 방법론에 대한 회의가 사라졌다. 인문학의 문헌학적 인간 탐구에 병행하여 사회조사 방법론을 병용하는 용기를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