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담(調査談)

● 1999년 6월 17일 설립 25주년 기념 단행본 〈한국갤럽의 어제와 오늘〉에서 발췌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
- 최상진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

내가 박무익 소장을 알게 된 것은 1980년도 초반이었다.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이만영 교수의 소개로 처음 그를 만난 장소는 광화문 근처의 모 다방으로 기억된다. 물론 이 교수로부터 박무익 소장의 성품과 관심에 대해 익히 들은 바 있어 그에 대한 사전 선입견이 작용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우나 어찌됐든 그날 다방에서 본 박 소장의 첫인상은 무엇인가 궁금증으로 가득 찬 생각하는 철학자였다.

사회조사기관을 자영하는 사람이라면 사교적이어서 대인관계의 폭이 넓고, 사고의 융통성이 많아 어지간히 틀리거나 모호한 이야기라도 그냥 듣고 넘어갈 줄 아는 포용력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상식적인 기대였으나, 그의 말과 인상은 전혀 기대와 어긋나 있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박 소장과 헤어진 후, 이만영 교수에게 그는 사업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했던 일이 기억난다.

그 후 박 소장의 사업은 재정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자신이 사는 집까지 은행에 저당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참 안됐다’는 생각과 더불어 ‘그가 원하면 나도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어설픈 동정심 내지 의협심마저 느끼던 터에 박 소장이 나에게 연구 제안서작성을 도와달라고 부탁해 왔다. 그 당시가 아마 1983년 내지 84년도 봄으로 기억된다.

그때 박 소장과 내가 상도동에 있는 우리 집 서재에서 며칠간의 작업을 거쳐 완성한 제안서를 펀딩(Funding) 기관에 제출했던 일이 아직도 생각난다. 이 일을 계기로 박 소장과 나는 인간적으로 친해졌고, 업무상으로도 나의 전공과 지식이 박 소장이 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시내에 나갔다가 시간이 나면 한국갤럽에 들르고, 또 그곳에 가면 박 소장을 비롯한 그곳 연구원들과 조사와 관련된 학문적 담론의 장을 한 자락 깔아놓고 오는 것이 나의 즐거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박 소장은 직접 나에게 자기 회사 일을 맡기는 일도 없었고, 또한 공식적 자문도 요청하지 않아 다른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을 갖기도 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박 소장은 모든 연구를 연구원 중심 체제로 운영해 나갔으며 따라서 외부 인사들은 주변에서 자문을 하는 역할로만 활용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정책에 휘말려 나는 여러 번 갤럽의 프로젝트를 갤럽 연구원들과 더불어 수행한 적이 있다. 이 중에서는 내가 직접 가르친 제자들도 여럿 있어서 그럴 때마다 나는 자문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연구 보고서 작성에 투입하곤 했다. 이를 박 소장은 아는지 모르는지.

이렇게 자문 역할만 하다가, 지난 1997년도 대선 때는 박 소장과 같은 수준에서 김덕구 상무와 더불어 ‘한국인의 투표행동에 대한 한국적 접근’이라는 연구를 함께 수행하였다. 그 당시에 받은 연구비는 고작 1,000만 원. 그러나 오랜만에 박 소장과 함께 하는 연구인지라 나는 많은 노력과 경비를 들여 나름대로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연구에 실제로 든 연구비는 1,500만~2,000만 원 정도였으며, 아직도 나는 이 말을 박 소장에게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박 소장이 이 연구를 통해 나의 가치를 인정한다고 생각해준 것-실제로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만으로도 자위하고 있으며, 그 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지금도 흡족해 한다. 특히, 이때 사용했던 4개의 한국적 문항, 즉 '1) 우리 지역의 정서에 맞는 후보 2) 우리 편이라고 느껴지는 후보 3) 정을 주고 싶은 후보 4)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느껴지는 후보'라는 문항들은 한국인의 특성적 문화심리에 근거한 문항으로서, 한국인 투표행위의 예언력이 매우 높은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이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과거에 내가 생각했던 박무익관(觀)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사무실에서 형광등을 켜지 않거나 창문에 커튼을 내리는 등 어두운 방에서 홀로 사고하는 것을 즐긴다. 나는 과거에 박 소장을 ‘사고하는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로 비유한 바 있다 그런데 박 소장이 디오게네스가 못된 것은 디오게네스와는 달리 햇볕을 싫어하고 어두운 곳을 좋아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박 소장은 나처럼 인정받고 싶어서 나름대로의 심오한 생각을 진지하게 토로하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말을 불쑥불쑥 내뱉는 버릇이랄까, 아니면 악취미가 있다. 예컨대, 한참 동안 한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그래서 어떻다는 이야기냐’, 또는 ‘정말 그렇다는 말이냐’는 등의 전면적 무시를 부담 없이 내뱉는다.

또한, 박 소장은 긴 이야기를 싫어한다. 사실 나 같이 생각이 천박한 학자들은 정답을 갖고 있지 못할 때 말을 길게 하여 무식을 호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에게는 이러한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 이러한 박 소장의 성격을 잘 반영하는 것이 갤럽의 질문 문항이다. 갤럽 문항은 명확간결, 간단명료하다.

따라서 나는 갤럽 소장을 만나기 전에 먼저 김덕구 상무와 만나 내 실력을 한번 과신한 후, 그 다음에 박 소장을 만나곤 했다. 박 소장이 내 말을 거꾸로 뒤집어 질문할 때 김덕구 상무가 보조 사격을 잘해주기 때문이다. 지금도 박 소장 앞에서 말을 하려면 긴장이 앞선다.

그의 성품 속에는 그가 갤럽조사연구소를 설립하게 된 기본 철학인 ‘엉터리(엉터리 조사) 없애기’가 깊숙이 체질화되어 있다. 바로 그의 이러한 철저함이 그의 연구소에서 행하는 모든 연구에 알알이 박혀있어 갤럽의 고객들에게 높은 신뢰감을 심어준 것으로 확신한다. 조사기관에서 신뢰성보다 더 중요한 자산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결국은 나의 예측, 즉 박 소장은 돈 벌기 그른 사람이라는 예측은 빗나갔다. 아마도 박 소장이 우리나라 조사 연구에 미친 가장 큰 공헌은 ‘조사는 신뢰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산다.’라는 생각을 우리 사회에 실증해 보인 일일 것이다.

조사 연구 및 업계에 대한 박 소장의 두 번째 공헌은 문항을 상품화 했다는 점이다. 박 소장은 10여 년 전에 나에게 자신은 문항 하나하나에 대해 가격을 매겨 판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나는 미처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보다 타당한 조사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많은 문항을 한꺼번에 많이 집어넣어 조사하는 것이 장땡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이었다. 그래서 되도록 문항을 많이 썼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문항을 많이 쓴다는 것은 비경제적일뿐더러 정선된 문항, 즉 한 문항이 하나의 명백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수준의 문항을 등한시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석사는 물론, 박사학위 논문에서까지도 잘못된 문항, 쓸데없는 문항을 많이 집어넣어 타당한 대답을 얻지 못하게 됨은 물론 분석에서 여러 가지 혼란을 초래하는 문제를 나는 요즘 실감하고 있다. 박 소장은 문항을 아끼고, 문항을 날카롭게 만들고, 문항을 상품화했다는 점에서 조사학과 조사업계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세 번째로는 〈한국인의 여론 시리즈〉의 발간이다. 한국의 아동에서부터 청소년, 주부, 노인 등에 이르는 전 연령층은 물론 장애인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의식에 대해 조사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 가치관, 식생활, 직업, 가정 등 전 생활영역에 걸친 한국인의 의식을 조사해 두꺼운 책자를 발간했으며, 이 값진 책자를 관련 기관은 물론 대학에, 사회에 광범위하게 보급하였다. 앞으로 100년 후에 이 책자는 100년 전 한국인을 생생한 자료로 알려주는, 성경처럼 애독되는 책자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결코 이 책자는 그가 돈을 벌기 위해 만든 책자가 아닌 것으로, 이는 그의 촌스러운 그 무슨 소명감, 예컨대, 역사의식, 사회의식, 학문의식 등에서 빚어진 일종의 사건이다. 박 소장 같은 깍쟁이(친구 밥도 싼 것만 사주는 깍쟁이)가 이런 일을 하다니!

어찌됐든, 박 소장은 괴짜다. 우리나라에서 조사 업무가 밥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해 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남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조사기관을 만든 것부터가 정상은 아니다. 술집에 가서도 술만 마셨지 여자하고 연애 한번 못하는 것도 비정상이다. 자기 회사의 중요한 클라이언트회사 사장에게 그 알량한 중국요리 하나 사주지 않는 것도 탈정상이다. 그런데도 연구만 잘하고, 장사만 잘하니, 내가 비정상인가 박 소장이 비정상인가. 괴짜가 정상 이상이라는 것을 박 소장은 나에게 실감시켜 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