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6월 17일 설립 25주년 기념 단행본 〈한국갤럽의 어제와 오늘〉에서 발췌
25년 전 비늘조각(片鱗)들
- 이만영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나는 원래 기억력이 시원치 않은 사람이다. 20여 년 전 한국갤럽 일을 생각하자니 너무 아득하고 먼 곳에 있어 실체가 분명치가 않다. 한국갤럽의 역사가 내 머리 속에는 이미 편린으로만 남아 있다. 그것도 주로 박무익 소장에 대한 편린이다. 그 편린들을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 엮어 보겠다.
박무익 씨와 내가 자주 만나게 된 것은 그가 종로2가에 조사연구소를 설립한 직후였다. 내가 한국행동과학연구소 연구원이었을 때일 것이다. 당시에 나는 통계분석법과 SPSS, 표본설계법, 설문지 작성법 등 조사 연구법 전반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그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자주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도와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설문지 작성을 검토한 기억이 있다. 통계분석을 도와준 적도 있다. 표본 설계를 함께 논의한 적도 있다. 그러나 어느 한 가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마무리해 준 기억은 없다.
그는 경이로운 직관력의 소유자였다. 내가 끙끙대면서 도와주는 시늉만 해도 그는 그것으로 걸작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유치원생 그림을 그려다 주면 그는 캔버스에다 피카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내가 그의 일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했던 것은 시간과 능력 등 나의 문제이기보다는 그의 불가사의한 직관력 때문이었다.
어느 분야의 전문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교 교육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지적 호기심이며, 문제 해결을 위한 치열한 투쟁이다.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임하는 ‘끼’가 있어야 전문가로 성공할 수 있다. 조사 연구 분야도 마찬가지다. 현실문제가 교과서에 있는 방법을 적용하여 논리적으로 해결되는 일은 없다. 치열한 투쟁을 통하여 얻게 되는 현실문제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끼’가 없이는 창의적 통찰을 얻을 수가 없다.
박무익 씨는 ‘끼’가 대단한 사람이다. 그의 ‘끼’가 ‘조사연구’와 만나서 만들어진 것이 오늘의 한국갤럽이다. 한국에 조사연구 전문기관의 존재 가능성을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때에 조사연구 방법론의 문외한인 그가 조사연구 전문기관을 만들고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집을 팔아 셋집을 전전하며, 어려운 고비를 넘긴 것은 모두 그의 ‘끼’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평범한 사람의 논리로 보면 무모한 일이었을 것이다.
금성사 의뢰로 전국적 마케팅조사를 할 때였다. 자료 분석 과정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 추적해 나가던 중 지역별 분석에서 대구지역 자료의 특이성이 발견되었다. 대구지역 조사 대상이자 일부를 재방문하여 검증한 결과 일부 설문지가 조작된 사실이 밝혀졌다. 즉시 대구지역 전체자료를 폐기하고 조사팀을 재구성하여 조사하였다.
이러한 일처리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에 쫓기면서 특이한 연구결과를 이해하기 위해서 끝까지 추적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거니와 문제가 발견된 일부 자료를 폐기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대단한 결단이었다. 그 당시가 재정적으로 대단히 곤궁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의 끼가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날 한국갤럽 조사에 대한 높은 사회적 신뢰에는 이러한 과거가 깔려 있다고 믿는다.
럭키화학의 의뢰로 합성세제 신제품에 대한 시장성을 조사한 일이 있다. 당시에 럭키는 자사의 ‘하이타이’가 합성세제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상황에서 표백제가 포함된 신제품을 개발하여 ‘희다’라는 상표명으로 포장되어 출하를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연구 결과에서 박무익 씨는 ‘희다’의 출하를 포기하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리고 럭키화학을 적극 설득하여 ‘희다’라는 제품은 햇빛을 보지 못했다. 덕분에 한동안 한국갤럽의 조사에서 답례품으로 ‘희다’가 사용되었다.
조사연구를 많이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조사연구 결과가 중요한 의사결정 방향을 자명하게 보여주는 경우는 드물다. 연구자의 해석과 직관이 중요하다. ‘희다’의 출하포기 결론도 상당 부분 박무익 씨의 직관적 판단이었다. 나는 그의 직관에 공감했으나, 럭키 측을 설득하는 데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제품 개발비용과 첫 출하분의 생산비용을 모두 무효화시키는 결정을 적극 설득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끼’가 발동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때부터 나는 한국갤럽에 도움을 주는 입장이 아니라 한국갤럽에서 배우는 입장으로 입장을 완전히 바꾸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한국갤럽도 많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제부터 새로운 도약이 필요하다. 정보화 사회는 완전히 새로운 활동공간을 급속히 확장하고 있다. 한국갤럽이 이 새로운 활동공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정보를 더욱 효과적으로 생산하고 가공하여 고객과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