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6월 17일 설립 25주년 기념 단행본 〈한국갤럽의 어제와 오늘〉에서 발췌
팔리지 않는 조사 책 꾸준히 발간
- 박찬원 코리아나화장품 대표이사
한국갤럽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5년 전으로 내가 제일제당의 마케팅 담당 과장으로 있던 시절이었다. 한국갤럽의 창업과 거의 같은 시기로 기억된다.
조미료 경쟁이 한창 치열하던 그때, 알고 싶은 것은 많은데 마땅한 조사회사가 없었다. 때로는 마케팅실 직원들이 직접 설문지를 만들어 가정집을 방문하며 인터뷰 조사를 하기도 하고, 대학 교수나 행동과학연구소 같은 곳에 조사를 의뢰하던 시절이었다. 그 후에 광고회사에 조사부가 생기고, 몇몇 조사회사가 등장했다.
한국갤럽에 처음 조사를 의뢰한 것은 지금도 인기 있는 옴니버스 조사였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마케팅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신제품 시장조사, 전략 제품의 트래킹(tracking)조사 등을 한국갤럽과 함께 진행했다.
내가 삼성자동차에 있을 때는 일본리서치센터와 제휴하여 한국에서 가장 방대한 규모의 자동차 소비자 조사를 함께 수행하기도 했고 삼성소비자문화원에 있을 때도 그룹 내 회사의 고객만족도 조사 등 많은 일에 한국갤럽의 도움을 받았다.
회사 업무에도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개인적으로 더욱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조사에 각별한 흥미를 갖게 해준 한국갤럽의 여러 조사 관련 책들이다. 한국갤럽은 딱딱하고 재미없는 조사 이야기를 아주 쉽고 흥미 있게 바꾸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국갤럽에서 발행하는 책들은 나에게 귀중한 조사 교과서가 되어 주었다.
조사를 할 때마다 부딪히는 문제 중 하나가 샘플 사이즈에 관한 것이다. 그 많은 고객의 생각이나 행동을 어떻게 1, 2천 명 조사해서 알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이에 대해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고인이 된 갤럽 박사는 “한 솥의 수프 맛을 알기 위해 수프 전체를 맛볼 필요는 없다. 한 국자만 떠서 맛을 보면 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나에게 샘플 사이즈에 대한 확신을 주었으며, 그 후 조사에 대하여 의문점을 갖는 분들에게 내가 가장 많이 인용하는 이야기이다.
역시 한국갤럽에서 번역 출간한 <최신마케팅조사기법>도 조사디자인 등 감성적인 분야에서 새로운 조사 방법이 없을까 고심할 때 가장 적절한 해답을 준 책이기도 하다.
<한국인의 여론 시리즈>는 박무익 소장의 고집으로 출간된 책이지만 우리나라 조사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조사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팔리지도 않는 책을 그리 여유가 없던 시절에 비싼 돈을 들여가며 꾸준히 발간해 내던 박 소장의 용기는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역시 박무익 소장은 조사업계 기인이다. 그때 박 소장 밑에서 조사를 담당하던 간부들이 조사에서 돈 벌어서 책 만드는데 다 까먹는다고 투덜대던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선거조사로 꽤 돈도 벌고 명성을 날리던 시절 발간했던 전문조사잡지 <갤럽리포트>도 매우 흥미 있었다. 선거 결과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주부들의 구매패턴, 청소년들의 의식, 갤럽의 세계 공동조사 등은 사회변화를 계량적으로 해석하는 묘미를 맛보게 해주었다. 최근 신문이나 잡지마다 사회적인 이슈에 대하여 소비자의 의견을 물어 보도하는 기사 내용은 갤럽의 조사잡지가 효시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잡지로는 가격이 좀 비쌌지만 소비자의 트렌드, 사회의 트렌드를 읽는 데는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한국갤럽에 거는 기대로는 지난 25년간의 연구결과, 조사 결과를 묶어서 2000년대를 지향한 <한국인의 의식변화 시리즈>를 발간할 때가 됐지 않았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