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담(調査談)

● 1999년 6월 17일 설립 25주년 기념 단행본 〈한국갤럽의 어제와 오늘〉에서 발췌

한국갤럽과의 그리운 추억
- 이이지마 켄지(飯嶋建治) 일본 리서치센터 디렉터

한국갤럽의 창립 25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나는 한국갤럽이 지금까지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제 한국의 여론 및 시장조사업계 정상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나와 한국갤럽의 첫 만남은 박무익 소장이 도쿄에 위치한 우리 회사에 당시 이사로 재직 중이던 니끼 고오지(二木宏二: 나중에 사장이 되고, 3년 전에 타계) 씨를 방문하였을 때 이루어졌다. 한국갤럽이 설립된 지 2~3년 후인 1976년경의 일이었다. 박 소장의 용건은 조지 갤럽(George H. Gallup) 박사의 책 <The Sophisticated Poll Watcher's Guide>를 한국어로 출판하면서 일본어판의 번역자인 니끼 씨를 만나보고 일본 리서치센터의 조사 방법과 조사시설을 살펴보는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나는 평사원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사장을 만날 수 있는 직급은 아니었지만 국제조사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 소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 박 소장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당시 유행하던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어서 마치 록그룹 멤버와 같은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의 일을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은 못되지만 지금 박 소장의 헤어스타일과는 꽤나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그 후 박 소장과는 첫 만남 때부터 뭐랄까, 남녀가 서로 강하게 끌리는 것 같은 상당히 강한 친근감을 서로 느낄 수 있었다. 나와 박 소장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우선 첫째로 술을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둘째로 골프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잘 통했다고 할까. 단, 술과 골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말이 통하려면 마음을 열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인 일이지만 일본에서는 서로 솔직히 마음을 터놓고 말하지 않는 편이다. 일본인은 역사나 문화적으로 속마음과 겉치레를 따로 구분해 행동해왔다. 그래서 상당수의 일본인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본심을 털어놓지 않는다. 술을 마셔도 본심을 털어놓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낮에는 대개 겉치레만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나는 일본인 가운데서도 소수파로, 본심을 잘 말하는 성격이다. 그것이 박 소장으로 대표되는 한국인들의 성격과 잘 맞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와 박 소장은 ‘죽이 잘 맞는’ 사이가 되었다. 나로서는 평생의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박 소장과의 만남을 무척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족이지만, 이 본심을 말하는 성격은 나의 인생에 아주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일 때문에 많이 만나는 서구인들은 본심을 털어놓고 사업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인의 겉치레적인 국민성은 세계에서도 예외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 서울의 한국갤럽을 방문한 것은 1980년 초가을이었다. 20년 전의 일이지만, 일본 총리부 청소년대책본부의 의뢰로 ‘국제 아동의 해’를 기념한 국제비교조사를 한국에서도 실시하게 되어 프레젠테이션을 갖기 위해서였다.

늦더위의 기운이 아직 남아 있던 어느 날 한국갤럽의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회사는 그리 크지 않았고 직원도 10명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박 소장은 자신이 직접 조사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바깥 소음이 시끄러워 라디오 볼륨을 크게 올린 채 가요를 들으면서 뭐는 몇%, 뭐는 몇%라는 식으로 보고서를 손으로 직접 작성하고 있던 모습이 기억난다. 나에게는 그 모습이 아직도 그리운 추억이다.

이를 시작으로 그 뒤 한국갤럽과는 많은 일을 함께 해 왔다. 세계청소년의식조사, 국제가치관조사, 노인생활과 의식에 관한 국제비교조사, NHK의 아시아의식조사 등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이다. 한국갤럽도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조사, 담배테스트조사, 자동차에 관한 조사 등 많은 일을 의뢰해왔다.

앞에서 우리 회사의 니끼 전 사장에 대해 얘기했었다. 니끼 씨는 생전에 가끔 생각이 나는 듯 “박 소장이 처음 도쿄에 왔을 때, 조사라는 일이 한국에서 제대로 될까요? 돈벌이가 될까요? 라고 질문해서, 일본에서도 제대로 되고 있으니까 괜찮겠지요 라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오늘날 한국갤럽의 대활약을 보면 니끼 씨의 답변은 정확했다고 볼 수 있다. 정확할 뿐만 아니라 한국갤럽은 대통령선거의 예측 정확성 등으로 산업계뿐만 아니라 전 국민 70%가 한국갤럽의 이름을 인지하고 있을 정도로 신뢰도가 높은 여론조사회사, 마케팅조사회사로서 확고한 지위를 확립하고 있다.

조지 갤럽 박사가 살아있다면 한국갤럽의 활약을 보면서 ‘아시아의 NIES 대표국에 갤럽방식의 조사가 뿌리를 내렸다’고 감탄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갤럽의 끊임없는 노력을 치하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와 함께 한국갤럽을 아는 모든 사람은 조지 갤럽 박사와 함께 한국갤럽의 25주년을 축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