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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담(調査談)

한국갤럽, 조사인, 조사 이야기

[인터뷰] 인생은 동사(動詞)라는 최초의 여론조사인
2011/01/01
  • [문사철4호_인생은동사라는최초의여론조사인(201101).pdf] 다운로드

● 2011년 1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총동창회 회보 〈문사철〉 제4호 게재

인생은‘동사(動詞)’라는 최초의 여론조사인
- 박무익(철학 62), 인터뷰/글 안기석(철학 77)

“20년 전보다 우리 사회가 훨씬 쿨(cool)하게 되지 않았나요?”

그를 인터뷰하고 싶었던 것은 ‘한국 최초의 여론조사회사 설립자’, ‘1%의 승부사’, ‘숫자의 예술가’등의 수식어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날 때마다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묘한 매력’때문이었다.
박무익 한국갤럽조사연구소장은 투박한 경상도식 말투로 짧게 말하지만 그의 눈은 ‘따뜻한 침묵’을 가득 담고 있다. 마주 앉아 서 대화할 때는 허(虛)해 보이지만 골프 등 운동을 할 때는 실(實)이 넘친다. 황진이의 시를 즐겨 외우는 그는 20년째 에어로빅을 하며 DJ DOC의 〈나 이런 사람이야〉를 즐긴다. 그의 일상을 보면 도무지 통계나 여론조사 등의 단어를 떠올리기 어려우나 그의 ‘작품’을 보면 ‘소숫점 이하 숫자의 냄새’까지 스며 있다.
한국갤럽은 1974년 처음으로 문을 연 이후 수많은 기업의 마케팅 리서치를 진행해 왔고, 1987년, 1997년 두 차례 대선 예측에서 두각을 드러내 우리 국민의 71%가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조사회사가 되었다. 특히 1997년 대선 투표일 저녁 선거 직후에 박 소장이 직접 MBC 스튜디오에 나와 ‘1%의 차이로 DJ가 당선될 것’이라 예측한 것이 적중되어 시청자들에게 살아 있는 ‘여론조사 쇼’를 보여 주기도 했다.
박 소장은 그동안 MBC의 ‘성공시대’, ‘ 강인선 라이브 TV인터뷰’등에서 한국갤럽의 성공 비결에 대해 털어놓은 바 있지만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한국갤럽의 어제와 오늘’이란 책에는 박 소장과 오랫동안 같이 일했던 사람들의 추억담이 새록새록 쌓여 있지만 박 소장이 지니고 있는 매력의 일면만을 보여 주고 있다.
과연 몇 시간의 인터뷰를 통해 ‘묘한 매력’의 실체를 밝혀낼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품고 10월5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사직동 사무실 7층에서 그를 만났다. 창밖으로는 사직공원, 멀리는 북한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세로 줄무늬의 밝은 색 셔츠를 입은 박 소장은 “숨어 사는 즐거움을 더 이상 빼앗기긴 정말 싫은데…….”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 여론조사인의 전공으로는 사회학이나 심리학이나 통계학, 수학 등이 먼저 떠오릅니다만, 어떻게 철학을 전공할 생각을 했습니까.
우리 집안이 한약방을 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한약방에서 함께 살았어요. 그곳에서 약도 썰고 심부름도 하고 잠도 같이 자고 했어요. 약봉지가 천정에 걸려 있으니까 눈만 뜨면 한자가 그냥 눈에 들어왔어요. 할아버지한테 천자문과 명심보감도 배우는 등 어린 나이에 많이 알게 됐어요.

MBC에서 방영한 ‘성공시대’를 보면 어린 시절의 박 소장이 감기 환자가 찾아오자 한약을 직접 처방해 주는 모습이 나온다. 박 소장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딸만 6명 있는 큰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한의사 ‘견습 생활’은 고등학생이 되자 끝난다. 구룡포중학교에서 경북사대부고로 진학하게 된 것이다.

그때 세계사상전집 20권이 나왔는데 한자를 아는 덕분에 대충 읽을 수 있었어요. 그런 조숙함이 나로 하여금 철학과를 택하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뭔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거랄까요.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나는 뭐가 되겠다는 것보다 뭔가 잘 알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있었어요. 그때 대입 국가고시는 전국의 철학과 지망생 성적을 1등부터 3만 등까지 공개했어요. 나는 수학을 잘하지 못하는 편이었는데도 전국 13등 했는데 마침 시험 전에 본 수학 참고서에서 비슷한 문제가 많이 나오는 바람에 운이 좋았던 거지요.

그러나 서울대 철학과는 그와 궁합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학 커리큘럼이 독일어나 그리스어 원서 강독으로 되어 있었고, 마치 메마른 종이를 씹는 기분이 들어서 철학과는 멀어지게 되었어요. 당시에는 데모가 잦아 칸트 원서 한 페이지 반 정도 읽고 한 학기가 끝나는 경우도 있었어요. 대학교 3학년 때 한국일보에 1,000만 원 상금이 걸린 장편소설에 응모하기 위해 휴학을 하고 소설을 쓴 적이 있어요. 그때 습작의 모델이 앙드레 말로의『정복자』나 사르트르의『자유의 길』등이었지요. 이 작품들을 대여섯 번 읽고, 수사학을 배우긴 했지만 체험이 없으니까 그들의 말장난인 것 같아서 소설 쓰기도 그만 두었어요.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앙드레 말로(1901~1976)의 첫 소설이자 출세작인『정복자』는 1925년 홍콩과 광둥의 총파업에 참여한 작가의 전기적 소설이기도 하다. 박 소장은 이 작품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저의 인생은 앙드레 말로의 아류로 살아왔다고 할까요? 삶은 동사(動詞)잖아요. 이론적으로 불에 대해 아무리 떠들면 무얼 합니까. 불에 덴 상처를 가진 자가 불을 아는 거지요. 존재의 증명은 많이 아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할 때 느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인생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표현이 마음에 와 닿았다. 명사형 삶이 어떤 지위나 모습에 고착된 것이라면 동사형 삶은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리라. 

- 대학생 시절에 데모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김지하 시인이 마이크를 잡고 주도했던 6.3데모에도 참여했어요. 그래서 김 시인의 입담과 선동력이 얼마나 센지 잘 알고 있어요.

- 철학과를 졸업 한 뒤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철학과 졸업 후 취직 시험에 응시해도 계속 떨어지기만 했어요. 당시 기업의 수가 적어서 철학과 출신은 신문사 외에는 취직할 곳이 없었어요. 그러던 차에 김영대 대성산업회장이 경영학과 대학원에 같이 가자고 해서 경영학을 전공하게 된 겁니다. 철학에 비해 공부하기가 훨씬 쉬웠어요. 마치 잡지 읽듯이 경영학은 쉬웠어요.

박 소장은 대학원에서 마케팅을 전공한 뒤 금성사 광고 선전부에 취직했다. 이곳에서 박 소장은 광고 카피라이터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유명 카피로는 ‘안방의 태양’과 타임지에 실린 ‘실크로드’등이 있었다.

- 그렇게 유능한 직원이 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뒀습니까.
당시 나는 광고 카피라이터로서 이름을 알렸고, 프리랜서로 독립한 뒤 대한항공, 근화제약, 삼성전자 등의 광고를 맡게 되었어요. 1973년에는 1년 동안 ‘TV의 신시대’ 카피 등으로 삼성전자의 광고를 도맡아 하기도 했지요.

이런 인연으로 박 소장은 우리나라 최대 광고 회사인 제일기획 창립 멤버로 6개월을 몸담았으나, 곧 조사회사를 세우게 되었다. 1974년에 세운 조사회사의 이름은 KSP(Korea Survey Poll)이었다. 최초의 조사 프로젝트는 금성사의 ‘세탁기의 광고 효과 측정’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기업들이 시장조사를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사회사는 어려움이 계속되었다.

- 한국갤럽조사연구소란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갤럽 박사가 쓴『갤럽의 여론조사』란 책을 1978년에 번역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책 번역의 허락을 받기 위해 편지를 보내니까 아무 조건 없이 허락했어요. 그 후 조지 갤럽 박사가 호주에서 열린 갤럽국제회의에 오라고 해서 그를 만났어요. 1979년에 그의 이름을 상호로 사용하게 됐어요.

- 1979년 갤럽 멤버가 되기 위한 인증 절차를 밟을 때 당시 갤럽 사무총장인 N. Webb 당시 사무총장을 경주까지 모시고 가서 전통적인 해장국을 대접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는 통곡했다면서요.
아주 좋은 분이고 친하게 지냈어요. 영국 케임브리지대 수학과 출신인데 유럽에서는 꽤나 저명한 분이었어요. 그분이 일본 갤럽 사장 고오지니키 씨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때여서 서울에서는 갈 만한 음식집들이 문을 닫아서 경주까지 모시고 내려간 겁니다.

- 회사 이름을 바꾼 뒤 회사의 운명도 달라졌습니까? 
‘Gallup’이라는 이름이 여론조사의 대명사이기 때문에 곧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또한 갤럽인터내셔널에 가입하면서 국제 조사에도 참여하게 되어 큰 보람을 느꼈지요. 예를 들면 일본 정부로부터 아동들의 의식구조, 청소년들의 의식구조, 노인들의 의식구조 등 여러 프로젝트를 참여할 수 있었어요. 또 해마다 갤럽국제회의에 참석할 기회가 많아져 안목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갤럽국제회의는 해마다 나라를 바꾸어 가며 열리기 때문에 여러 나라를 구경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고, 회의 때마다 개최 국가와 언론의 우대를 받으면서 리서처 가 명예로운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례로 1980년에 영국 국제회의 때에는 국회의장이 빅벤이 있는 국회의사당 안에서 갤럽 회원들을 초대해 직접 만찬을 베풀어 줬어요.

- 197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국내에서는 민주주의가 질식상태였는데 여론조사가 제대로 될 수 있었습니까.
당시에 주된 고객은 기업이었으나, 물건을 만들면 팔리던 시대였기 때문에 기업의 시장조사에 대한 수요가 아주 적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몇몇 다국적 기업들도 진출해 있었고, 다소 경쟁이 있었기 때문에 경영 의사결정을 잘 하려면 우선 지도(Mapping)를 만드는 일이 먼저라는 것을 역설하면서 돌아다녔습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모습이랄까…….

- 당시 시장조사를 통해 탄생한 상표로는 유니나 샴푸, 데이트 비누, 썬파워 배터리 등 몇 개 꼽을 수 있는데요. 여론조사 결과 인기가 없으면 브랜드명을 폐기한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이타이를 ‘희다’로 개명하는 것을 시장조사를 해 보고 폐기시킨 경우가 대표적인 예라던데요.
그런 경우는 가끔 있었어요. 조사를 해 보면 기업의 광고 효과도 적은 비용으로 금방 알 수 있어요. 당시에 (주)진로의 ‘길벗’이란 위스키 광고 효과 측정을 한 적이 있는데 광고비를 한 달에 50억 쓰고도 효과는 제로(0)라고 프레젠테이션을 한 적이 있어요. 당시 사장님은 조사가 잘못됐다고 질책했는데, 길벗의 매출이 1년 후에 우리의 예측대로 크게 떨어지자, 그 회사 고위층은 우리 조사의 결과를 신뢰하게 되었죠. 그러나 결국 광고 담당자는 책임을 지고 옷을 벗게 된 비극적인 일도 있었어요.

- 기업의 입장에서는 자사 제품의 시장점유율을 조금이라도 높여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요구가 가끔은 있었지만 저는 항상 거절해 왔습니다. 우리 회사는 우리 나름의 여론조사 원칙을 지키고 있는데, 문항이 길거나 조사용역비가 싸면 맡지를 않아요. 조사의 품질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우리의 20년 고객이던 한 대기업에 새로 부임한 담당자가 너무 저가를 요구해 조사를 포기한 경우도 있습니다.

 ‘성공시대’를 보면 정부의 최저가 입찰에도 박 소장은 꿈쩍하지 않았다.  ‘높은 품질을 요구하는 여론조사를 마치 무슨 시멘트나 철근처럼 입찰하고 깎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

3년 전 우리 회사는 일본 정부로부터 1인당 15만 원씩 2,200명 조사 기준으로 3억 5,000만 원까지 받은 적이 있는데 아마 이 기록이 우리나라 최고 조사비 기록일 거예요. 제대로 된 여론조사를 원하는 고객은 비용을 제대로 지불해요. 일본은 조사 비용 때문에 조사 회사를 선정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 질문지의 문항은 간결하고 명료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고객들로부터 불평을 듣지는 않습니까.
요즈음 특히 다국적 기업들이 긴 질문지로 조사하기를 자주 요구하는데 우리나라 현실과 맞지 않기 때문에 거절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항상 조사에 응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지 조사인 편의대로, 마구잡이로 질문하는 것은 넌센스지요. 조사의 신뢰도와 타당도를 높게 유지하려 하기 때문에 우리의 매출 규모가 급성장하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만, 그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일본 정부, 미국 정부(USIA), 국내 일류 기업들이 우리 회사와 20년 이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 한국갤럽 매출액의 80%는 기업의 마케팅 조사지만, 일반 국민들에게는 정치 여론조사 회사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한국갤럽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결정적인 계기는?
1987년 국내 최초로 대선 예측 조사를 꼽을 수 있겠지요. 우리는 저녁 6시에 투표가 끝나자마자 ‘노태우 당선’이라는 선거 예측 조사 결과를 국내외 언론 앞에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를 가장 먼저 보도한 매체는 일본 NHK TV 저녁 7시 뉴스였으나, 국내 언론은 다루지 않 았어요. KBS의 박성범 앵커만 “이런 데이터도 있습니다. 두고 보시죠.”라고 10초간 언급하고 지나갔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언론에서는 선거 예측을 해 본 적이 없었고 겁이 나서 발표하지 못한 거죠.

- 당시 공개하지 않은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신다면요?
당시 금성사의 이은준 전무가 어떤 후보가 앞서냐고 여러 번 물어봤어요. 그래서 내가 선거기간 동안 노태우 후보가 한 번도 1위를 내준 적 없다고 하니까, ‘정신 나간 소리’라며 비웃었어요. 당시 LG 쌍둥이빌딩에서 일하는 직원 4,000여명을 대상으로 모의 투표를 했는데 60% 이상이 YS를 지지한다는 거예요. 실제로 우리 선거 예측 조사에 의하면 서울에서 20~30대 젊은이들은 60%가 YS를 찍었어요. 그분은 무작위 표본추출(Random Sampling)에 의한 조사 결과가 아니면 무의미하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지요. 무작위 표본추출이 아닌 조사는 아무 의미 없지요. 선거 후에 나보고 대단히 미안하다고 그랬어요.

-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자 ‘컴퓨터 부정선거’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지 않습니까.
내 기억으로는 그 당시 2% 이내에서 투표 결과를 적중한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투표일 3일전에 김대중 후보가 유세하는 보라매공원에 갔는데, 그때 단상에서 누가 하는 말이 투표일 다음날 오후 7시에 서울역에 모이자는 겁니다. 당선 축하식을 하겠다는 거지요. 떨어지면 부정선거라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의 선거 예측이 나가면서 그런 주장의 근거를 막아 버린 겁니다. 부정선거 논란의 여지를 없애 버린 거지요. 선거 자금과 관련해서 재계의 충격이 특히 컸어요. 의사 결정을 주먹구구식으로 하면 안 되겠다는 거지요.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위한 실증 조사의 필요성을 보여 준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이후로 우리 회사 매출은 연50% 증가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여론조사의 고속도로를 깔았다고 할까요?

1997년 12월18일 저녁 6시, 대선 예측 결과와 실제 선거 결과의 차이는 당선자 기준으로 0.4%, 2위는 0.2%, 3위는 0.5%의 오차로 정확하게 순위까지 적중시켰다. 
 
- 그때 박 소장님이 MBC에 나와서 직접 발표하고 설명했는데 자신이 있었습니까. 
“문화방송과 계약해서 한 조사인데 실제 결과와 틀리더라도 발표해야죠. 당시 이득렬 사장은 방송 3사와 합의했기 때문에 발표하지 않으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문화방송 선거 기획단이 강력하게 주장해서 결국 MBC만 발표하게 됐어요. 개표 초반에는 우리의 선거 예측과 다르게 이회창 후보가 10% 이상 앞서는 것으로 나와서 모두 얼굴이 하얘졌지만 밤 10시10분경부터 김대중 후보가 앞서기 시작했지요. 발표 당시 한나라당 분위기는 험악했다고 해요. 한국갤럽을 혼내 주겠다고 TV를 향해 재떨이를 던지는 당원도 있었고 문화방송 기자도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해 밖에서 서성거렸다고 들었습니다.

‘성공시대’를 보면 이 드라마틱한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박 소장은 당시 인터뷰에서 ‘시청자들은 투표결과를 본 것이 아니라 선거 여론조사 쇼를 본 것’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 총선 예측에서는 실패한 경우도 있지요.
선거 예측에서 보통 2%의 표본 오차 수준이 되려면 1,000명 정도는 조사해야 합니다. 반면 총선 예측의 경우 조사 예산 상의 제약 때문에 300명 정도 적은 표본으로 200여 군데를 동시에 조사하기 때문에 표본 오차와 비표본 오차가 커져 막판 변화를 예측하기 쉽지 않습니다.

- 갤럽이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선거 예측을 발표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거예측을 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 선거 과정을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이 선거 여론조사뿐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선거 과정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합니다.
셋째, 이렇게 발표를 함으로써 일반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합리적으로 만들고 우리 사회를 건전하게 만듭니다. 즉 자료에 의존하지 않은 의사 결정이 무모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87년 대선을 한 번 회상해 보십시오. 모의 투표가 여기저기서 횡행했고, 식당마다 어느 후보가 이길 것인지에 대한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암흑 속에서 꼭두각시 놀이를 한 것 과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그러니 선거 예측 조사 발표는 사회를 환하게 불을 밝혀 준 셈이었지요. 그 후 해마다 선거 예측을 발표하여 지금처럼 우리 사회가 쿨하게 변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87년에 우리가 선거 예측을 하지 않았다면, 선거 다음 날 서울역부터 전국적으로 부정선거 규탄이 발생해 폭력으로 소용돌이쳤을 겁니다. 지금 돌아보면 40년 가까이 조사 분야에서 일해 온 조사인으로서 저의 역할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박 소장은 조지 갤럽 박사가 1934년에 고안한 과학적 표본추출법은 마치 자연과학에서 망원경이나 현미경의 발명과 같이 사회과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여론조사가 우리 사회과학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론조사가 정의, 행복 등 가치지향적 내용도 실증적으로 밝힐 수 있는 것은 갤럽의 랜덤 샘플링 덕분입니다. 이 이론은 사회과학에 수학적인 개념을 도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회과학 논문에서 조사를 활용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여론조사 없이 어떤 주장을 한다면 그것은 당신 개인의 의견일 뿐이라고 폄하하더라도 할 말이 없지요.

- 한국의 여론조사 실정은 어떻습니까?
외국보다 오히려 더 앞선 면도 있어요. 한국의 여론조사 풍토는 열악하기 때문에, 예컨대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성향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간접적인 질문지 방식 개발 등이 필요했습니다.
예를 들면 문항을 대화체로 쉽고 간단하게 만들되 한국인의 성향을 고려해서 만들어야 합니다.  “내일 어느 후보를 찍을 겁니까?”라고 직설적으로 묻기보다는 “어느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조금이라도 더 좋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야 제대로 된 답변을 얻을 수 있어요. 이 워딩은 우리 연구소가 처음으로 개발한 것으로 누구를 찍느냐고 물으면 무응답이 45% 나오지만 누가 더 좋으냐고 물으면 무응답이 15%로 줄어들어요.

박 소장은 기업의 시장조사 외에도 우리 사회나 국민들의 의식을 읽어 낼 수 있는 흥미 있는 여론조사를 하거나 그 결과를 발표하기도 한다. 많은 비용을 들여 ‘한국인의 여론조사 시리즈’를 책자로 만들었다. 한국갤럽 홈페이지 첫 화면에는 한국인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들을 재미있게 보여 주고 있다.

한국인의 여론조사 시리즈 중의 하나는 1981년에 23개국 공동으로 인간의 가치관을 조사한 데 이어 15년 후에 다시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만든 것도 있어요. 국제 비교 조사를 하면서 얻은 자료인데 그냥 사장한다는 것은 책임을 방기하는 거라고 생각되어 책으로 만들어 내고 있어요. 앞으로 우리 돈 들여서 계속 업데이트 할 예정입니다.

이미 20년 전에 윤이흠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와 ‘한국인의 종교의식’조사를 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한국인의 철학의식’조사도 했다.

철학과 동창회장을 맡고 나서 ‘한국인이 생각하는 철학’이란 여론조사를 했어요. 5년 전에 조사했는데 그때 책을 내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시 조사를 해서 올해 안으로 책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책이 나오면 전국의 철학과 교수님들에게 한 부씩 드리려고 해요.

박 소장은 6년째 철학과 동창회장을 맡고 있다. 해마다 1월이 되면 서울시청 옆 프레스센터에서 맛있는 음식과 좋은 음악을 준비해 놓고 사람들을 맞이한다. 국악인을 초청해 공연 한 적도 있다.

- 국악에도 관심이 있습니까.
지인이 함께 가자고 해서 판소리를 3개월 동안 배운 적이 있어요. 노래를 부르는 것은 동사형 삶이잖아요. 심청가에 나오는 가사의 수사학은 정말 놀랍습니다. 심청전에는 ‘바느질하다’에 해당하는 말이 70개나 나와요. 세익스피어 작품에서보다 더 위대한 수사학이라 할 수 있겠지요.

박 소장은 인간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중요시한다.

직원들에게 교육할 때 조사인은 인간에 대해 관심뿐만 아니라 인문학적인 소양도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요. 휴머니티가 있어야지요. 평소에 생활이 어려운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빈부 격차에 대해 정부가 취해야 할 정책에 관한 조사를 잘 맡을 수 있지요. 최근 대형 마트 광고에 고기나 생선을 싸게 판다는 문구와 사진을 크게 클로즈업하여 내보내고 있어요. 광고를 하는 기업들은 그것도 사 먹지 못하는 사람이 그 광고를 보고 무엇을 느낄지, 그리고 동네 구멍가게 주인이나 어촌 소매상은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해 볼 수 있어야지요.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사람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까?
최근 500억 원을 기부한 영화배우 신영균 씨, 또 한 사람을 꼽으라면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을 꼽겠어요. 아흔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서도 쉬지 않고 100층 이상의 빌딩을 지으려 하고, 현장을 부지런히 방문한다 합니다. 나에게는 부질없게(?) 느껴지는 것들에 대한 그의 열정이 경이롭습니다.

- 박 소장님도 계속 ‘조사인’으로 활동하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어쩌다가 우리나라 조사 역사에 이름을 새기게 되었는데요. 떠밀려서 제정하여 시상하는 제도를 만들게 되었어요. 올해 한국조사연구학회와 공동으로 조사 연구에 기여한 우수 논문에 대해서 갤럽학술상을 6회째 시상을 했지만 아무쪼록 우리나라 조사 발전에 조그만 기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의 직업은 차갑고 쿨한 숫자로 다양한 사회를 읽어 내는 리서처지만, 앙드레 말로의 아류처럼 살아왔다는 그의 행동 철학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지금도 그는 150여 명의 30대 이하의 직원들과 한 달에 두세 번은 노래방에 가고, 엘리베이터에서 직원들을 만나면 “How happy are you?”라고 묻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