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발행 단행본 〈조사인으로 살다: 박무익 회고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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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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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지방 선거와 1996년 국회의원 선거를 거치며 우리 국민은 선거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방송사, 신문사들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적극적으로 조사하고 보도했다. 정당들은 일찍부터 조사를 통해 출마할 후보들의 경쟁력을 저울질했다. 조사 결과에서 자신의 당선 가능성이 작다고 판단한 후보들은 중도에 사퇴하기도 했다.
제15대 대선은 그 어느 때보다 토론회가 많았다. 1997년 한 해 동안 주요 방송사, 지역 민방, 케이블TV를 비롯해 관훈클럽, 여의도클럽, 재향군인회 등 여러 언론과 단체들이 주관한 토론회로 넘쳐났다. 제13대 대선까지 여러 후보들이 대규모 군중 동원 유세로 경쟁하던 것이 좀 더 구체적인 인물과 정책으로 어필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제15대 대선의 유력 후보는 여당인 신한국당의 이회창, 야당인 새천년민주당의 김대중, 그리고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서 낙선하자 국민신당을 창당해 독자 출마한 이인제 등 세 사람이었다. 1997년 5월 조사에서 각 후보 지지도는 김대중, 이인제, 이회창 순이었다. 연초부터 달아오른 선거 열기와 달리 한국의 경제 상황은 대기업 연쇄 부도와 외환 위기로 수렁에 빠졌다. 결국 선거 한 달 전인 11월, 우리나라는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11월 15일 조사에서 김대중 34.0%, 이회창 24.4%, 이인제 23.7%로 2, 3위가 바뀌며 비슷해졌지만 김대중 후보의 선두 위치는 상대적으로 견고해 보였다. 선거일 전 마지막으로 언론에 발표할 수 있었던 11월 20~22일 조사에서는 김대중 33.1%, 이회창 28.9%, 이인제 20.5%, 무응답 16.7%로 이회창 후보가 약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선거여론조사 파트너였던 MBC, 조선일보, 한국갤럽은 공표 금지 기간 전 마지막이라는 데 의미를 두고 여느 때보다 표본 수를 키워 전국 유권자 5,262명을 사흘에 걸쳐 조사했다. 조선일보는 11월 24일 1, 4, 5, 7면에 그 결과를 상세히 실었다. 나는 조선일보에 여론조사의 한계를 설명하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글을 기고했다.
마지막 언론 보도가 나간 11월 24일 이후 선거판은 어둠에 가렸다. 선거법 때문에 공개적으로 보도는 할 수 없었지만, 판세가 궁금한 곳들은 비공개 조사를 하고 있었다. 한국갤럽 역시 12월 1일, 7일, 14일까지 조사를 계속했다. 이 무렵, 우리 연구원 중 한 명이 모처에 출입하는 정치부 기자로부터 얻은 각종 여론조사 종합 보고서를 들고 왔다. 11월 29일, 12월 2일 기준으로 조사회사별, 후보자별 결과가 나와 있었는데 놀랍게도 우리 조사 결과가 포함돼 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한국갤럽 이름 옆에 적힌 수치였다. 내가 모르는 수치, 한국갤럽 조사 결과가 아니었다. 누군가 조작한 그 ‘작품’은 공식 선거운동 기간 중 여론조사 공표를 막은 탓에 탄생한, 어둠 속을 활개 치는 괴물이란 생각이 들었다.1)
12월 14일, 김대중 32.2%, 이회창 27.1%, 이인제 16.6%, 무응답 22.7%. 무응답 판별분석 후 수치는 김대중 38.1%, 이회창 38.1%, 이인제 22.6%. 열흘 전에 비해 김대중 후보는 1.7%포인트 감소한 반면 이회창 후보는 3%포인트 증가해 두 후보 간 격차가 없어졌다. 기가 막혔다. 이번 선거 결과는 하늘만 알지 투표함 뚜껑이 모두 열리기 전에는 누구도 모르겠다 싶었다.
선거일을 이틀 앞둔 12월 16일, 무응답 판별 결과 김대중 37.2%, 이회창 37.1%, 이인제 24.2%. 격차는 겨우 0.1%포인트. 실상 격차라고 할 수 없었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함을 의미했다. 이제 성패는 선거 당일 투표율과 부재자 투표 추정치를 어떻게 반영하는가에 달렸다.
선거 전날 12월 17일 아침 배달된 조간신문에는 국민신당 당원들이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조선일보가 ‘이회창-김대중 선두 각축’이란 제목으로 작성한 기사에 대한 항의였다. 사실 그 시점에서 이인제 후보는 전혀 승산이 없었다. 그러나 여론조사 공표 금지 때문에 그런 상황을 알 수 없는 이인제 후보 지지자들에게는 조선일보 기사 제목이 몹시 거슬렸을 것이다. 투표함이 열리기 전까지 언론사와 후보 간 갈등은 불가피했다.
MBC-한국갤럽뿐 아니라 KBS-코리아리서치, SBS-리서치앤리서치가 선거 예측 방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제는 1, 2위 후보의 예상 득표율이 표본오차 범위 이내로 좁혀진 데 있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수집된 결과들이 모두 박빙이었다. 각 방송사 선거팀은 적잖은 비용을 투입하고도 예측 방송 여부를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측과 다른 결과가 나올 경우 감당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방송 3사 사장단은 12월 14일 모임에서 예측 보도를 자제하기로 합의했다.
선거를 사흘 앞둔 12월 15일에는 사장들의 뜻을 전달받은 방송 3사의 보도이사들이 만나 예측 결과를 당일 밤 자정까지 발표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KBS와 SBS는 16일부터 이 합의 사실을 뉴스에 내보냈다. 그러나 MBC는 이를 언급하지 않았고, 선거 전날까지 발표를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선거일 1주일 전쯤으로 기억한다. 1, 2위 순위와 격차가 엎치락뒤치락, 혼전이 계속되자 타 방송사들의 의뢰를 받은 조사회사들이 나에게 조사 결과를 공유하자는 제안을 했다. 구체적인 예측 수치는 차치하고 각 후보의 순위라도 공유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오차 범위를 벗어나 10%, 20% 차이가 있을 때만 예측 발표를 하고 박빙이면 예측 발표를 포기하시오? 쉬울 때만 예측하는 것은 선거 예측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
말없이 전화가 끊어졌다.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비록 순위가 틀리더라도 예측치가 오차 범위 내에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믿었다. MBC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기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들은 당락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 시청자에 대한 약속 이행, 선거 예측 방송의 선진화 등을 이유로 방송 3사 사장단 합의를 무시하고 예측 발표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16일 저녁, MBC 보도이사는 KBS와 SBS에 합의를 이행하지 않을 것임을 전화로 통보했다.
선거 전날 밤, 투표자 조사 외 모든 준비를 끝내고 연구원들과 함께 소주 몇 잔을 걸쳤다. 12월 18일 새벽 0시 20분, 집에 들어가자마자 MBC 이득렬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의 집은 우리 집 뒤로 담장 사이가 불과 5미터도 되지 않았다.
“朴 소장, 이거 너무 박빙이군요. 내일 발표하기엔….”
여론조사 비전문가인 방송 경영인의 고심이 그대로 전해졌다. 정확하진 않지만, 나는 이런 맥락으로 취중 대답을 한 것 같다.
“아, 네, 뭐랄까요. 아, 그래도 내일, 아니 오늘, 투표자 조사에서 또 하나의 선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잡아드리겠습니다.”
이득렬 사장이 내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때 그 시각 이 사장 집엔 MBC 임원진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베란다 창밖으로 우리 집을 바라보며 전화를 한 것이다.
오전 10시쯤 회사에 출근했다. 모두 부산하게 움직였다. 전화조사실은 투표자 조사를 진행 중인 조사원들의 통화 음성으로 꽉 찬 느낌이었다. 이날 예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투표율이었다. 우리는 투표율 70%, 75%, 80%를 가정해 적용할 분석 모형을 준비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투표율은 예상보다 높아졌다.
오전 11시, 그때까지 조사 완료된 700명 데이터가 올라왔다. 75% 투표율을 가정했을 때 김대중 후보가 0.5%포인트 앞섰다. 낮 12시 30분, 700명 데이터가 추가로 올라왔다. 이번에도 김대중 후보가 0.6%포인트 앞섰다. 정오 무렵 우리는 역대 선거보다 투표율이 높을 것으로 예상하고 최종 예측에 반영할 투표율을 82% 정도로 잡았다. 그리고 오후 2시, 투표자 2,500명 전화조사를 종료했다.
모(某) 일간지 조사팀은 오후 1시까지 조사를 진행하고 결과를 산출한 모양이었다. 한 연구원이 그쪽으로부터 이회창 후보가 앞섰다는 전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타사의 조사 결과가 무슨 소용인가. 더구나 우리 조사 결과와는 반대였다. 우리에게 후보별 순위를 공유하자고 제의한 두 조사회사는 서로 다른 결과가 나오는 바람에 현재 조율 중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조사 결과를 조율해? 그럼 왜 그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따로 조사를 하는가? 언제나 조사 진행 과정을 검토하고 발견한 문제점을 개선할 여지는 있지만, 일단 얻어진 조사 결과는 조율하고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후 4시 30분, 분석이 끝났다. 김대중 39.9%, 이회창 38.9%, 이인제 19.7%. 95% 신뢰수준에서 표본오차는 ±2%포인트. 1, 2위 차이는 단 1%포인트. 예측치가 오차 범위 내에 있다면 순위가 틀려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성적으로, 이론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감성적으로, 실제로는 표본오차를 차치하고 예측 순위가 틀릴 경우 혼란과 비난이 있을 것이다.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 감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오후 5시, 나는 MBC로 향했다. 5시 30분, MBC 이득렬 사장과 임원들이 모인 장소에 도착했다. 자욱한 담배 연기,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그들은 이미 우리 예측치를 들어 알고 있었다. 1%포인트 차이라니.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에게 당부가 쏟아졌다.
“朴 소장, 거 여론조사에 표본오차라는 거 있잖소. 그게 있어서 1% 정도 차이 나는 경우는 앞뒤가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다고, 그렇죠? 맞죠? 그렇게 여러 번 말해요. 알았죠? 좌우지간 여러 번 말해야 합니다.”
1997년 12월 18일 오후 6시, 나는 여의도 MBC 방송국의 선거 방송 스튜디오에 앉아 있었다. 일본 후지TV는 MBC 개표 방송을 생중계했다. NHK, CNN 등 많은 외국 언론들도 일제히 우리의 선거 예측을 취재했다. 드디어 나를 향한 카메라에 빨간 불빛이 들어왔다. 오후 6시 정각. 나는 담담하게 결과를 발표했다.
“지금부터 제15대 대통령 선거 예측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김대중 후보가 예측에서 1%포인트 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앞섭니다. 1위는 민주당 김대중 후보로 39.9% 득표를 할 것으로 예상되며, 2위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로 38.9%를….”
발표를 끝낸 뒤 내 앞의 카메라는 미끄러지듯 자리를 옮겨갔고 나는 그곳을 떠나 화장실로 향했다. 분장실에서 얼굴에 발랐던 파우더를 씻어내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선거 예측을 한 조사인은 전 세계 앞에 벌거숭이로 선 것이라던 조지 갤럽 박사의 말이 떠올랐다.
MBC 이득렬 사장과 임원진이 개표 방송을 함께 지켜보자며 나를 불렀다. 오후 7시부터 개표가 시작됐다. 초반부터 이회창 후보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더 흐른 오후 8시쯤엔 이회창 후보 46%, 김대중 후보 38% 정도가 됐다. 우리 예측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담배 연기 그득한 실내는 개표 방송을 보는 이들의 속마음처럼 답답했다. 박빙이라던 예측과 달리 이회창 후보의 독주에 안절부절못하던 이득렬 사장이 참다못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朴 소장, 저건 왜 저래요?”
“사장님, 아마 이회창 후보 우세 지역이 먼저 개표돼서 그럴 겁니다. 밤 10시쯤 돼야 지역별 개표 상황이 형평을 찾아가기 마련이죠. 어디 가서 소주 한잔하시고 개표 방송을 지켜보시는 게 어떨지요.”
그는 미간을 모으고 말없이 화면만 응시했다. 나는 일어섰다. 김덕구 상무, 허진재 차장, 홍승우 연구원 등 우리 선거팀과 함께 저녁을 하기 위해 여의도를 돌며 음식점을 찾았으나 문을 연 곳이 없었다. 결국 한강 다리를 건너 마포의 어느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우리 일행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서로 할 말이 없었다.
음식점 주인은 좀 전에 TV에서 나를 봤다며 반겼다.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는지 그는 우리의 예측이 맞을 것 같다며 들떠 말했다. TV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거실에 있던 TV를 아예 방으로 옮겨 주었다. 10% 넘게 개표를 했는데도 여전히 이회창 후보의 우세가 이어지고 있었다. 전국 개표율 10% 상황에서 우세한 후보가 끝까지 우세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는 망연자실했다.
“술은 즐겁게 마셔야 하는 거야. 철학자들이 진리를 끝까지 추구하다 잘 모르면 에포케(epoch?, 판단 중지)를 선언하는 것처럼. 이제 나쁜 일에 대한 생각은 끊어버려. TV에서 흘러나오는 개표 숫자의 의미만을 냉엄하게 헤아려 보자고. 자, 술이나 마시자!”
소주잔이 몇 바퀴 돌았을 즈음, 앵커의 음성이 다소 빨라지면서 톤도 높아졌다. 화면을 보니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추격하면서 격차가 점차 줄고 있었다. 개표율이 20%를 넘어서자 두 후보가 몇 번씩 선두를 주고받았다. 개표율이 25%에 이르면서부터 김대중 후보의 상승세가 가팔라졌다.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MBC 선거기획단 기자였다.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우리의 예측이 맞아가고 있다며 인터뷰할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방송국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두어 시간 만에 돌아온 방송국 분위기는 확 바뀌어 있었다. 소리 내어 웃는 사람도 보였다. 이 무렵 개표 상황은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1.5%포인트 내외로 일정하게 앞서가고 있었다.
12월 19일 새벽 3시, 아직 개표는 진행 중이었다. 1위와 2위의 차이는 38만여 표, 1%포인트 차이였다. 한나라당 선거 상황실에 나타난 이회창 후보가 결과에 승복하겠다고 말하는 모습이 TV 화면에 나왔다. 나는 그 모습에 크게 감동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다니…. 이회창 후보는 페어플레이가 무엇인지 보여준 것이다.
불과 10년 전인 1987년 당시 1위와 무려 8%포인트나 격차가 벌어진 개표 결과를 놓고도 낙선한 후보들이 부정 선거라며 불복하고 투쟁을 선언했던 것과는 얼마나 달라진 모습인가! 정치 문화의 성숙은 여론조사의 성숙과 비례하고, 후보자의 자질과도 비례한다는 말을 입증한 셈이다. 이제 한국도 민주주의가 가능한 시대에 진입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의 최종 개표 결과는 김대중 40.3%, 이회창 38.7%, 이인제 19.2%. 우리 예측치는 김대중 39.9%, 이회창 38.9%, 이인제 19.7%. 당선자의 실제 득표율과 예측치의 차이는 0.4%포인트, 2위는 0.2%포인트, 3위는 0.5%포인트였다. 전국 8개 권역별 득표율과 실제 득표율의 차이도 평균 1.7%포인트 정도로 정확했다.
국내외 언론들은 ‘통계학의 예술, 갤럽 여론조사 비결’ 등의 제목으로 한국갤럽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다. 갤럽 인터내셔널의 여러 회원사들은 축하와 함께 조사방법에 대한 문의를 해왔다. 미국갤럽 부사장도 한국갤럽 선거 예측을 실은 외신 보도 기사를 보내주며 축하해주었다.
그날 자정 이후 KBS와 SBS가 밝힌 예측 결과도 김대중 후보가 앞섰고 최종 개표 결과와 차이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개표가 단 1%라도 진행된 이후의 발표는 별 의미가 없다는 점이 선거 예측의 기본이다. 예측 발표를 보류한 두 방송사는 개표 초반 이회창 후보가 앞서는 것을 보고 발표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MBC가 크게 실수했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들었다.
예상대로 KBS, SBS는 자정까지 발표하지 않기로 한 합의를 깬 MBC를 맹비난했다. 일방적으로 합의를 깬 사실 자체에 대한 비난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MBC가 처음부터 DJ에 줄을 섰기 때문에 DJ가 1위라는 예측 결과를 갈등 없이 발표할 수 있었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에는 분개했다. 선거 예측 발표 전 많은 이들의 논의와 고민이 있었을 뿐이다.
선거 예측 후 또다시 이런저런 논란의 중심에 선 나는 여러 인터뷰와 기고문을 통해 여론조사의 역할과 제대로 활용하는 법에 대해 역설했다. 우리 조사 결과를 믿고 승부수를 띄우기는 했지만, 이렇게 작은 차이로 적중한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축하 전화를 받으며 한국갤럽 직원들, 전화조사원들, 어려운 상황에도 오후 6시 선거 예측을 발표하는 결단을 내린 MBC 임원진과 선거기획단, 무엇보다 우리 조사에 협조해 준 분들이 고마웠다. 또한, 나에게 조사인으로의 사명감을 일깨워준 조지 갤럽 박사에게 또다시 고마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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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20년이 지난 요즘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SNS, 카카오톡 같은 미디어를 통해 출처를 알 수 없는 ‘찌라시’, ‘괴담’, ‘가짜 뉴스’, 그리고 별별 조사 결과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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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지방 선거와 1996년 국회의원 선거를 거치며 우리 국민은 선거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방송사, 신문사들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적극적으로 조사하고 보도했다. 정당들은 일찍부터 조사를 통해 출마할 후보들의 경쟁력을 저울질했다. 조사 결과에서 자신의 당선 가능성이 작다고 판단한 후보들은 중도에 사퇴하기도 했다.
제15대 대선은 그 어느 때보다 토론회가 많았다. 1997년 한 해 동안 주요 방송사, 지역 민방, 케이블TV를 비롯해 관훈클럽, 여의도클럽, 재향군인회 등 여러 언론과 단체들이 주관한 토론회로 넘쳐났다. 제13대 대선까지 여러 후보들이 대규모 군중 동원 유세로 경쟁하던 것이 좀 더 구체적인 인물과 정책으로 어필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제15대 대선의 유력 후보는 여당인 신한국당의 이회창, 야당인 새천년민주당의 김대중, 그리고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서 낙선하자 국민신당을 창당해 독자 출마한 이인제 등 세 사람이었다. 1997년 5월 조사에서 각 후보 지지도는 김대중, 이인제, 이회창 순이었다. 연초부터 달아오른 선거 열기와 달리 한국의 경제 상황은 대기업 연쇄 부도와 외환 위기로 수렁에 빠졌다. 결국 선거 한 달 전인 11월, 우리나라는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11월 15일 조사에서 김대중 34.0%, 이회창 24.4%, 이인제 23.7%로 2, 3위가 바뀌며 비슷해졌지만 김대중 후보의 선두 위치는 상대적으로 견고해 보였다. 선거일 전 마지막으로 언론에 발표할 수 있었던 11월 20~22일 조사에서는 김대중 33.1%, 이회창 28.9%, 이인제 20.5%, 무응답 16.7%로 이회창 후보가 약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선거여론조사 파트너였던 MBC, 조선일보, 한국갤럽은 공표 금지 기간 전 마지막이라는 데 의미를 두고 여느 때보다 표본 수를 키워 전국 유권자 5,262명을 사흘에 걸쳐 조사했다. 조선일보는 11월 24일 1, 4, 5, 7면에 그 결과를 상세히 실었다. 나는 조선일보에 여론조사의 한계를 설명하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글을 기고했다.
| 〈결과에 일희일비(一喜一悲) 말자〉 여론조사는 현 시점의 스냅 사진일 뿐 현재 지지도 투표일까지 계속 변할 것 이번 대선만큼 언론에 여론조사 결과가 자주 보도된 적이 없었다. 또한 이번만큼 여론조사가 선거 과정에 영향을 끼친 적도 없을 듯하다. 지지도가 낮은 후보들의 사퇴와 합종연횡(合從連橫)을 몰고 왔고 정치인들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가속시킨 것 같다. 이의 장단점에 관한 논의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여론조사가 선거 과정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지난 87년, 92년 대선 때 우리 언론이 백중지세(伯仲之勢) 등의 수사를 동원한 가십성 혹은 억측 보도를 하여 결과적으로 유권자를 혼란에 빠뜨리게 하고 선거 과정을 왜곡시켰던 경험에 비하면, 이번 선거가 얼마나 그때보다 산뜻하고 공명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여론조사의 정확성과 공정성에 대한 시비도 꼬리를 물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가 서로 다르고 2, 3위 후보의 격차와 순위가 뒤바뀌는 등 혼란이 일었다. 보다 정확한 조사를 위해 무응답 비율을 10％ 이하로 줄였다고 하는 상식 이하의 조사기관도 있었고, 무응답 비율이 앞의 조사에서는 30％, 그다음 조사에서는 5％ 선으로 나오는 조사기관도 있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하는 언론 쪽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표본오차를 고려하지 않고 1％포인트라도 앞서면 역전이라는 헤드라인을 달기도 하고, 표본 수 50명 이하인 지역의 지지도 변화를 도별로 시계열 비교하는 등의 기사들도 많았다. 여하간 이번 조선일보와 MBC가 공동으로 마지막 여론조사 발표시한을 앞두고 대규모의 조사(표본 수 5천여 명)를 행한 것은 15개 시도별로 여론의 흐름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획이었다는 점에서 사기(史記)적 의미가 있고, 학자들에게도 유용한 선거 분석 자료를 제공한다고 본다. 독자들이 여론조사 결과를 잘 해석하기 위해 이번 여론조사의 다음과 같은 한계를 유념해 주었으면 한다. 첫째, 이 조사는 11월 20일부터 22일까지 사흘간에 이뤄져서 투표일 26일 전의 상황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여권 후보가 분열되고 3개월 전부터 각 후보의 지지도가 뒤바뀌고 있는 혼란스런 이번 선거의 경우 현재의 지지도가 투표일까지 이어지기 어려워 보인다. 둘째, 이번 조사의 총 표본 수는 5천 명으로 이때까지의 대선 관련 여론조사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할 수 있으나, 시도별 최소 표본은 3백 명(호남 지역 제외)이므로 지역별로는 표본오차가 크다는 점이다. 셋째, 투표일 26일 전인 현재 지지후보 질문에 ‘말할 수 없다, 모르겠다’는 응답이 20％에 이르고 원천적으로 전화를 끊어 응답을 거절하는 비율이 45％로 상당히 높기 때문에 이 ‘무응답’과 ‘응답거절’의 향방이 큰 변수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필자가 지적한 여론조사의 한계를 인식한다면 후보자들은 조사 결과에 그렇게 일희일비(一喜一悲)할 필요가 없다. 자기가 느끼는 감(感)과 너무 거리가 멀다며 여론조사 결과를 믿을 수 없다고 단정적으로 판단하지 말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여론조사란 선거의 판세를 바꾸는 바람이 아니라, 조사 시점의 온도를 보여주는 온도계에 불과하며 그 당시 상황을 기록한 스냅(snap) 사진일 뿐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현행 선거법에 따르면 26일 이후에는 여론조사 결과 발표가 금지된다. 따라서 앞으로는 온도계와 스냅 사진을 볼 수 없는 암흑 속에서, 각종 유언비어와 엉터리 여론조사 결과가 난무하리라 예상되므로 이런 뜬소문들은 믿지 말자. 이제 유권자들도 필자가 앞에서 지적한 여론조사 감상법을 되새겨, 믿을 수 있는 여론조사와 믿을 수 없는 여론조사를 구분하고 믿을 수 있는 여론조사를 활용한 언론기관이 어디인지를 기억하여 양(羊)과 산양(山羊)을 식별할 수 있을 때에만 한국의 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있으리라 본다. |
마지막 언론 보도가 나간 11월 24일 이후 선거판은 어둠에 가렸다. 선거법 때문에 공개적으로 보도는 할 수 없었지만, 판세가 궁금한 곳들은 비공개 조사를 하고 있었다. 한국갤럽 역시 12월 1일, 7일, 14일까지 조사를 계속했다. 이 무렵, 우리 연구원 중 한 명이 모처에 출입하는 정치부 기자로부터 얻은 각종 여론조사 종합 보고서를 들고 왔다. 11월 29일, 12월 2일 기준으로 조사회사별, 후보자별 결과가 나와 있었는데 놀랍게도 우리 조사 결과가 포함돼 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한국갤럽 이름 옆에 적힌 수치였다. 내가 모르는 수치, 한국갤럽 조사 결과가 아니었다. 누군가 조작한 그 ‘작품’은 공식 선거운동 기간 중 여론조사 공표를 막은 탓에 탄생한, 어둠 속을 활개 치는 괴물이란 생각이 들었다.1)
12월 14일, 김대중 32.2%, 이회창 27.1%, 이인제 16.6%, 무응답 22.7%. 무응답 판별분석 후 수치는 김대중 38.1%, 이회창 38.1%, 이인제 22.6%. 열흘 전에 비해 김대중 후보는 1.7%포인트 감소한 반면 이회창 후보는 3%포인트 증가해 두 후보 간 격차가 없어졌다. 기가 막혔다. 이번 선거 결과는 하늘만 알지 투표함 뚜껑이 모두 열리기 전에는 누구도 모르겠다 싶었다.
선거일을 이틀 앞둔 12월 16일, 무응답 판별 결과 김대중 37.2%, 이회창 37.1%, 이인제 24.2%. 격차는 겨우 0.1%포인트. 실상 격차라고 할 수 없었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함을 의미했다. 이제 성패는 선거 당일 투표율과 부재자 투표 추정치를 어떻게 반영하는가에 달렸다.
선거 전날 12월 17일 아침 배달된 조간신문에는 국민신당 당원들이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조선일보가 ‘이회창-김대중 선두 각축’이란 제목으로 작성한 기사에 대한 항의였다. 사실 그 시점에서 이인제 후보는 전혀 승산이 없었다. 그러나 여론조사 공표 금지 때문에 그런 상황을 알 수 없는 이인제 후보 지지자들에게는 조선일보 기사 제목이 몹시 거슬렸을 것이다. 투표함이 열리기 전까지 언론사와 후보 간 갈등은 불가피했다.
MBC-한국갤럽뿐 아니라 KBS-코리아리서치, SBS-리서치앤리서치가 선거 예측 방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제는 1, 2위 후보의 예상 득표율이 표본오차 범위 이내로 좁혀진 데 있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수집된 결과들이 모두 박빙이었다. 각 방송사 선거팀은 적잖은 비용을 투입하고도 예측 방송 여부를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측과 다른 결과가 나올 경우 감당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방송 3사 사장단은 12월 14일 모임에서 예측 보도를 자제하기로 합의했다.
선거를 사흘 앞둔 12월 15일에는 사장들의 뜻을 전달받은 방송 3사의 보도이사들이 만나 예측 결과를 당일 밤 자정까지 발표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KBS와 SBS는 16일부터 이 합의 사실을 뉴스에 내보냈다. 그러나 MBC는 이를 언급하지 않았고, 선거 전날까지 발표를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선거일 1주일 전쯤으로 기억한다. 1, 2위 순위와 격차가 엎치락뒤치락, 혼전이 계속되자 타 방송사들의 의뢰를 받은 조사회사들이 나에게 조사 결과를 공유하자는 제안을 했다. 구체적인 예측 수치는 차치하고 각 후보의 순위라도 공유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오차 범위를 벗어나 10%, 20% 차이가 있을 때만 예측 발표를 하고 박빙이면 예측 발표를 포기하시오? 쉬울 때만 예측하는 것은 선거 예측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
말없이 전화가 끊어졌다.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비록 순위가 틀리더라도 예측치가 오차 범위 내에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믿었다. MBC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기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들은 당락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 시청자에 대한 약속 이행, 선거 예측 방송의 선진화 등을 이유로 방송 3사 사장단 합의를 무시하고 예측 발표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16일 저녁, MBC 보도이사는 KBS와 SBS에 합의를 이행하지 않을 것임을 전화로 통보했다.
선거 전날 밤, 투표자 조사 외 모든 준비를 끝내고 연구원들과 함께 소주 몇 잔을 걸쳤다. 12월 18일 새벽 0시 20분, 집에 들어가자마자 MBC 이득렬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의 집은 우리 집 뒤로 담장 사이가 불과 5미터도 되지 않았다.
“朴 소장, 이거 너무 박빙이군요. 내일 발표하기엔….”
여론조사 비전문가인 방송 경영인의 고심이 그대로 전해졌다. 정확하진 않지만, 나는 이런 맥락으로 취중 대답을 한 것 같다.
“아, 네, 뭐랄까요. 아, 그래도 내일, 아니 오늘, 투표자 조사에서 또 하나의 선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잡아드리겠습니다.”
이득렬 사장이 내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때 그 시각 이 사장 집엔 MBC 임원진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베란다 창밖으로 우리 집을 바라보며 전화를 한 것이다.
오전 10시쯤 회사에 출근했다. 모두 부산하게 움직였다. 전화조사실은 투표자 조사를 진행 중인 조사원들의 통화 음성으로 꽉 찬 느낌이었다. 이날 예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투표율이었다. 우리는 투표율 70%, 75%, 80%를 가정해 적용할 분석 모형을 준비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투표율은 예상보다 높아졌다.
오전 11시, 그때까지 조사 완료된 700명 데이터가 올라왔다. 75% 투표율을 가정했을 때 김대중 후보가 0.5%포인트 앞섰다. 낮 12시 30분, 700명 데이터가 추가로 올라왔다. 이번에도 김대중 후보가 0.6%포인트 앞섰다. 정오 무렵 우리는 역대 선거보다 투표율이 높을 것으로 예상하고 최종 예측에 반영할 투표율을 82% 정도로 잡았다. 그리고 오후 2시, 투표자 2,500명 전화조사를 종료했다.
모(某) 일간지 조사팀은 오후 1시까지 조사를 진행하고 결과를 산출한 모양이었다. 한 연구원이 그쪽으로부터 이회창 후보가 앞섰다는 전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타사의 조사 결과가 무슨 소용인가. 더구나 우리 조사 결과와는 반대였다. 우리에게 후보별 순위를 공유하자고 제의한 두 조사회사는 서로 다른 결과가 나오는 바람에 현재 조율 중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조사 결과를 조율해? 그럼 왜 그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따로 조사를 하는가? 언제나 조사 진행 과정을 검토하고 발견한 문제점을 개선할 여지는 있지만, 일단 얻어진 조사 결과는 조율하고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후 4시 30분, 분석이 끝났다. 김대중 39.9%, 이회창 38.9%, 이인제 19.7%. 95% 신뢰수준에서 표본오차는 ±2%포인트. 1, 2위 차이는 단 1%포인트. 예측치가 오차 범위 내에 있다면 순위가 틀려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성적으로, 이론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감성적으로, 실제로는 표본오차를 차치하고 예측 순위가 틀릴 경우 혼란과 비난이 있을 것이다.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 감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오후 5시, 나는 MBC로 향했다. 5시 30분, MBC 이득렬 사장과 임원들이 모인 장소에 도착했다. 자욱한 담배 연기,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그들은 이미 우리 예측치를 들어 알고 있었다. 1%포인트 차이라니.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에게 당부가 쏟아졌다.
“朴 소장, 거 여론조사에 표본오차라는 거 있잖소. 그게 있어서 1% 정도 차이 나는 경우는 앞뒤가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다고, 그렇죠? 맞죠? 그렇게 여러 번 말해요. 알았죠? 좌우지간 여러 번 말해야 합니다.”
1997년 12월 18일 오후 6시, 나는 여의도 MBC 방송국의 선거 방송 스튜디오에 앉아 있었다. 일본 후지TV는 MBC 개표 방송을 생중계했다. NHK, CNN 등 많은 외국 언론들도 일제히 우리의 선거 예측을 취재했다. 드디어 나를 향한 카메라에 빨간 불빛이 들어왔다. 오후 6시 정각. 나는 담담하게 결과를 발표했다.
“지금부터 제15대 대통령 선거 예측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김대중 후보가 예측에서 1%포인트 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앞섭니다. 1위는 민주당 김대중 후보로 39.9% 득표를 할 것으로 예상되며, 2위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로 38.9%를….”
발표를 끝낸 뒤 내 앞의 카메라는 미끄러지듯 자리를 옮겨갔고 나는 그곳을 떠나 화장실로 향했다. 분장실에서 얼굴에 발랐던 파우더를 씻어내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선거 예측을 한 조사인은 전 세계 앞에 벌거숭이로 선 것이라던 조지 갤럽 박사의 말이 떠올랐다.
MBC 이득렬 사장과 임원진이 개표 방송을 함께 지켜보자며 나를 불렀다. 오후 7시부터 개표가 시작됐다. 초반부터 이회창 후보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더 흐른 오후 8시쯤엔 이회창 후보 46%, 김대중 후보 38% 정도가 됐다. 우리 예측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담배 연기 그득한 실내는 개표 방송을 보는 이들의 속마음처럼 답답했다. 박빙이라던 예측과 달리 이회창 후보의 독주에 안절부절못하던 이득렬 사장이 참다못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朴 소장, 저건 왜 저래요?”
“사장님, 아마 이회창 후보 우세 지역이 먼저 개표돼서 그럴 겁니다. 밤 10시쯤 돼야 지역별 개표 상황이 형평을 찾아가기 마련이죠. 어디 가서 소주 한잔하시고 개표 방송을 지켜보시는 게 어떨지요.”
그는 미간을 모으고 말없이 화면만 응시했다. 나는 일어섰다. 김덕구 상무, 허진재 차장, 홍승우 연구원 등 우리 선거팀과 함께 저녁을 하기 위해 여의도를 돌며 음식점을 찾았으나 문을 연 곳이 없었다. 결국 한강 다리를 건너 마포의 어느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우리 일행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서로 할 말이 없었다.
음식점 주인은 좀 전에 TV에서 나를 봤다며 반겼다.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는지 그는 우리의 예측이 맞을 것 같다며 들떠 말했다. TV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거실에 있던 TV를 아예 방으로 옮겨 주었다. 10% 넘게 개표를 했는데도 여전히 이회창 후보의 우세가 이어지고 있었다. 전국 개표율 10% 상황에서 우세한 후보가 끝까지 우세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는 망연자실했다.
“술은 즐겁게 마셔야 하는 거야. 철학자들이 진리를 끝까지 추구하다 잘 모르면 에포케(epoch?, 판단 중지)를 선언하는 것처럼. 이제 나쁜 일에 대한 생각은 끊어버려. TV에서 흘러나오는 개표 숫자의 의미만을 냉엄하게 헤아려 보자고. 자, 술이나 마시자!”
소주잔이 몇 바퀴 돌았을 즈음, 앵커의 음성이 다소 빨라지면서 톤도 높아졌다. 화면을 보니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추격하면서 격차가 점차 줄고 있었다. 개표율이 20%를 넘어서자 두 후보가 몇 번씩 선두를 주고받았다. 개표율이 25%에 이르면서부터 김대중 후보의 상승세가 가팔라졌다.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MBC 선거기획단 기자였다.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우리의 예측이 맞아가고 있다며 인터뷰할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방송국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두어 시간 만에 돌아온 방송국 분위기는 확 바뀌어 있었다. 소리 내어 웃는 사람도 보였다. 이 무렵 개표 상황은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1.5%포인트 내외로 일정하게 앞서가고 있었다.
12월 19일 새벽 3시, 아직 개표는 진행 중이었다. 1위와 2위의 차이는 38만여 표, 1%포인트 차이였다. 한나라당 선거 상황실에 나타난 이회창 후보가 결과에 승복하겠다고 말하는 모습이 TV 화면에 나왔다. 나는 그 모습에 크게 감동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다니…. 이회창 후보는 페어플레이가 무엇인지 보여준 것이다.
불과 10년 전인 1987년 당시 1위와 무려 8%포인트나 격차가 벌어진 개표 결과를 놓고도 낙선한 후보들이 부정 선거라며 불복하고 투쟁을 선언했던 것과는 얼마나 달라진 모습인가! 정치 문화의 성숙은 여론조사의 성숙과 비례하고, 후보자의 자질과도 비례한다는 말을 입증한 셈이다. 이제 한국도 민주주의가 가능한 시대에 진입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의 최종 개표 결과는 김대중 40.3%, 이회창 38.7%, 이인제 19.2%. 우리 예측치는 김대중 39.9%, 이회창 38.9%, 이인제 19.7%. 당선자의 실제 득표율과 예측치의 차이는 0.4%포인트, 2위는 0.2%포인트, 3위는 0.5%포인트였다. 전국 8개 권역별 득표율과 실제 득표율의 차이도 평균 1.7%포인트 정도로 정확했다.
국내외 언론들은 ‘통계학의 예술, 갤럽 여론조사 비결’ 등의 제목으로 한국갤럽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다. 갤럽 인터내셔널의 여러 회원사들은 축하와 함께 조사방법에 대한 문의를 해왔다. 미국갤럽 부사장도 한국갤럽 선거 예측을 실은 외신 보도 기사를 보내주며 축하해주었다.
그날 자정 이후 KBS와 SBS가 밝힌 예측 결과도 김대중 후보가 앞섰고 최종 개표 결과와 차이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개표가 단 1%라도 진행된 이후의 발표는 별 의미가 없다는 점이 선거 예측의 기본이다. 예측 발표를 보류한 두 방송사는 개표 초반 이회창 후보가 앞서는 것을 보고 발표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MBC가 크게 실수했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들었다.
예상대로 KBS, SBS는 자정까지 발표하지 않기로 한 합의를 깬 MBC를 맹비난했다. 일방적으로 합의를 깬 사실 자체에 대한 비난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MBC가 처음부터 DJ에 줄을 섰기 때문에 DJ가 1위라는 예측 결과를 갈등 없이 발표할 수 있었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에는 분개했다. 선거 예측 발표 전 많은 이들의 논의와 고민이 있었을 뿐이다.
선거 예측 후 또다시 이런저런 논란의 중심에 선 나는 여러 인터뷰와 기고문을 통해 여론조사의 역할과 제대로 활용하는 법에 대해 역설했다. 우리 조사 결과를 믿고 승부수를 띄우기는 했지만, 이렇게 작은 차이로 적중한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축하 전화를 받으며 한국갤럽 직원들, 전화조사원들, 어려운 상황에도 오후 6시 선거 예측을 발표하는 결단을 내린 MBC 임원진과 선거기획단, 무엇보다 우리 조사에 협조해 준 분들이 고마웠다. 또한, 나에게 조사인으로의 사명감을 일깨워준 조지 갤럽 박사에게 또다시 고마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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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20년이 지난 요즘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SNS, 카카오톡 같은 미디어를 통해 출처를 알 수 없는 ‘찌라시’, ‘괴담’, ‘가짜 뉴스’, 그리고 별별 조사 결과들이 돌아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