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발행 단행본 〈조사인으로 살다: 박무익 회고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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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론조사 TV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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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이후 우리나라 언론의 여론조사 결과 인용 보도는 정치, 사회, 라이프스타일, 산업별 실태 등 다방면에 걸쳐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리고 1995년 6월 27일,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자치 선거를 맞이했다.
MBC는 14대 대선에 이어 이번에도 한국갤럽에 선거 예측 조사를 의뢰했다. 나는 과거보다 더 큰 부담을 느꼈다. 대통령 선거는 당선자 한 사람만 맞추면 되지만, 지방자치 선거에서는 전국 15개 광역단체장을 맞춰야 한다. 대선 예측 15번을 동시에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지역별 조사 예산은 대선만큼 넉넉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선거 예측이야말로 조사회사의 역량이 어느 수준인지 가늠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각 지역에서 누가 당선할 것인지 맞추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초기 판세 분석에서 박빙 지역은 선거일 전까지 표본 1,000명 규모로 5~6회 정도 추적 조사하고, 1, 2위 후보 간 격차가 커서 당선자가 바뀔 가능성이 낮은 지역은 500명씩 2~3회만 조사하기로 했다. 이렇게 할 경우 대선보다 실제 득표율과 예측치 차이가 클 수밖에 없고, 지역에 따라 표본오차 범위를 크게 벗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사실상 득표율 예측은 포기한 차선책이었다. 제한된 예산, 인력, 자원으로 지방 선거에 출마한 모든 후보들의 실제 득표율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과욕(過慾)이었다.
1993년 말 우리나라 전화 보유율은 100명당 38대로 1가구 2전화 시대를 맞이했다. 휴대전화 가입자 수는 1995년 초 100만 명을 돌파했다.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선거일 전 면접조사를 능가하는 당일 투표자 전화조사의 효용을 경험했기에, 제1회 지방 선거 예측은 전화조사로만 계획했다.
당시 유권자들의 선거 관련 전화조사 응답 경향은 이러했다. 첫째, 후보 지지도를 묻는 질문에 50% 이상이 전화를 끊는다. 둘째, 선거 한 달 전까지도 유권자의 40%는 여전히 ‘아직 모르겠다, 말할 수 없다’고 답한다. 셋째, 응답을 하더라도 일부는 솔직하게 답하기를 꺼린다.
상황은 항상 유동적이다. 민심은 사회의 변화, 여론을 형성하고 전달하는 매체의 변화에 따라 계속 변한다. 조사에 대한 인식이나 응답 행태 역시 변한다. 과거에 적중했던 예측 방법이 이번에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이런저런 제약들 때문에 선거 예측이 빗나갔다고 말하는 것은 프로페셔널의 자세가 아니다. 그런 변명은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선거팀 사무실 벽에 ‘조사에서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문구를 큼지막하게 붙였다.
선거일 20일 전, 우리는 전화 250라인을 설치하고 매일 유효표본 4,000명 정도를 인터뷰했다. 임시로 마련한 100여 평의 공간에 150명 남짓한 전화조사원들이 오밀조밀 앉았다. 조사원들은 비슷한 톤으로 길어야 5분 정도 되는 인터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주의사항을 알리는 칠판에는 ‘최선을 당부합니다’라는 문구를 써놓았다. 조사원들을 감독하고 종이 응답지를 회수하는 데는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거의 전 직원이 돌아가며 전화조사실 지원에 나섰다.1)
1995년 6월 27일, 어김없이 D-day가 다가왔다. 전국 15개 시도 중 선거 당일까지 7개 지역이 박빙이었다. 선거일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전화조사원 350여 명을 동원해 투표자 1만여 명을 조사하기로 했다. 오전 11시까지는 투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사람이 많지 않아 조사원들은 쉴 새 없이 다이얼을 돌렸다.
MBC에 최종 예측 결과를 전달해야 할 시한은 오후 4시 30분. 나는 지난 대선 때처럼 TV 출연을 위해 오후 5시 30분까지 MBC에 도착해야만 했다. 오후 2시가 조금 지난 무렵, 지역별 데이터를 검토하던 허진재 연구원이 비명을 질렀다.
“악, 이게 뭐야! 제주도 1, 2위 순위가 바뀌었잖아!”
제주도는 전날까지 제주도지사를 역임한 무소속 신구범 후보가 1위, 2위는 민자당 우근민 후보로 예상됐다. 그런데 당일 투표자 조사에서 순위가 뒤바뀐 것이다. 허 연구원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반복 확인하면서 중얼거렸다.
“이거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일주일 동안 세 번 조사했을 때 신 후보가 1위였는데….”
제주도에서 막판 돌발사건이 있었는지 알아봤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같은 사무실 안에 있던 몇 명은 모두 당황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허 연구원이 갑자기 일어나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돌아온 그가 소리쳤다.
“소장님! 이런 일도 다 있네요. 제주 담당 조사원 한 명이 20명 응답을 모두 1번으로 해놨어요.”
1번은 민자당 후보였다. 한 조사원의 거짓을 찾아낸 것이다. 그 조사원은 왜 그랬을까? 우리의 예측이 틀리기를 바라는 누군가 보낸 첩자였을까? 선거 당일 경황이 없었던 우리는 이튿날 문제의 조사원을 추적했지만, 그가 제출한 이력서의 주소와 연락처는 거짓이어서 신원을 밝혀낼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다. 그 조사원의 얼굴만이 우리 연구원들의 뇌리에 남아 있을 따름이다.
오후 5시쯤 나는 최종 예측치를 담은 디스켓과 보고서를 들고 MBC로 향했다. 5시 50분부터 개표 방송에 출연해 이번 조사의 개요와 한계에 대해 설명하기로 되어 있었다. 방송 담당자에게 ‘이번에는 정말로 투표가 끝난 6시 정각에 선거 예측을 발표할 수 있는가’를 거듭 확인했다. 1992년 대선처럼 밤 12시에 선거 예측을 발표한 전례도 있고, 1995년에도 선관위는 여전히 방송사들에 선거 예측 발표를 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당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제167조(투표의 비밀보장) 2항은 ‘선거인은 투표한 후보자의 성명이나 정당명을 누구에게도 또한 어떠한 경우에도 진술할 의무가 없으며, 누구든지 선거일의 투표 마감 시각까지 이를 질문하거나 그 진술을 요구할 수 없다. 이를 위반할 경우, 제241조(투표의 비밀침해죄) 1항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6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되어 있었다.
당일 투표자 전화조사를 통해 선거 예측을 발표하는 것은 선거법 위반이었다. 그러나 조사업계나 방송업계, 선거 전문가들은 모두 그 법 조항이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비민주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물론, MBC도 법을 뛰어넘으려는 의지가 강했다. 특히 MBC는 그해 2월부터 고진(高進) 단장을 필두로 정치부 정예기자 5명이 선거기획단을 구성해 개표 방송을 치밀하게 준비해 온 터였다.
MBC에 도착하자마자 강성구 사장과 임원진이 모인 곳으로 갔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질문이 날아왔다.
“맞출 자신 있어요?”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차는 크더라도 순위는 맞출 수 있을 겁니다.”
나의 대답은 그들뿐 아니라 나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그들은 내게 선거 예측 조사에는 오차가 있고 1, 2위의 차이가 허용 오차 범위 안에 있을 땐 당락이 바뀔 수 있음을 시청자들이 명확히 알 수 있게 강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두 번째로 나간 MBC 개표 방송 스튜디오에는 엄기영, 정동영 두 앵커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시청자 여러분들이 일찍 주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개표 방송은 이런 말로 시작됐다. 오후 6시 15분, MBC는 한국갤럽의 투표자 전화조사를 근거로 ‘민자 5, 민주 4, 자민련 4, 무소속 2’라는 예상 판세를 보도했다. 우리나라 선거 역사상 처음으로 TV 개표 방송에서 선거 예측 결과를 발표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할애된 방송 시간 동안 세 번이나 되풀이해서 선거 예측과 오차의 의미를 설명했다.
투표함 1개를 개봉하기도 전에 TV가 전하는 선거 예측은 많은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선관위가 선거 예측 보도를 위법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MBC는 시청자에게 예고 방송을 하지 않았다. MBC의 19개 지방계열사들도 본사의 이런 계획을 전혀 몰랐다. 엄기영, 정동영 당시 개표방송 앵커들조차 방송 1시간 전 큐 시트를 받고서야 알게 됐다. 방송 내용을 주의 깊게 보지 않아 실제 개표 상황으로 착각한 일부 시청자들은 선관위나 언론사에 전화를 걸어 항의하기도 했다. 당시 여당이던 민자당은 초상집 분위기가 됐다. 자민련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야말로 ‘깜짝 TV쇼’가 연출됐다.
지역별 개표 상황은 밤 10시 무렵부터 우리 예측치와 점점 가까워졌다. 다음 날 새벽에야 당락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예상하고 따분한 개표 방송을 지켜보던 과거에 비하면 얼마나 산뜻한 방식인가. 일본 후지TV는 MBC 개표 방송을 일본 전역에 생중계했다. 최종 개표 결과, 한국갤럽의 15개 광역단체장 당선자와 후보자 순위 예측이 모두 적중했다. 각 후보자의 실제 득표율과 예측치 간 차이는 평균 3.7%포인트였다.
당시 선거 예측은 한국갤럽만 한 것이 아니었다. SBS-한국리서치 역시 오후 6시 선거 예측을 발표했다. 선거법 저촉을 우려해 선거 전날까지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예측치를 냈고, 한 지역(충북)에서 당선자 예측이 틀려 빛이 바랬다.
선거 다음 날부터 여러 언론들은 MBC-한국갤럽의 개표 방송과 선거 예측의 정확성을 다루는 한편, 적법성을 두고 뜨거운 공방을 벌였다. SBS는 선관위 유권해석에 따라 방송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선거 예측 보도를 하지 않은 KBS는 현행법상 출구조사는 위법이라며 MBC를 강하게 비판했다. 다음은 당시 적법성 여부에 대한 MBC-한국갤럽의 반박 논리다.
첫째, 당일 투표자 전화조사는 투표소 앞에서의 출구조사(Exit Poll)가 아니라 투표를 마친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한 전화조사다. 둘째, 선거 종료 후 결과를 발표했기 때문에 선거법 제108조 1항에 저촉되지 않는다. 셋째, 선거법 제167조 2항은 비밀 투표 보장을 위한 것이지 여론조사를 금지하는 내용이 아니다.
1995년 7월 21일, 헌법재판소는 1992년 제14대 대선 당시 여론조사 보도와 관련해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제소한 ‘선거 기간 동안의 여론조사발표금지 위헌’ 건을 기각한다는 결정 선고를 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선거법 개정 끝에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투표자 조사나 출구조사가 합법화됐다. 2005년부터는 여론조사 공표 금지 기간이 선거운동 기간 전체에서 선거일 6일 전으로 줄었다.
이런 갑론을박(甲論乙駁)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1987년과 1992년 불발된 ‘투표 종료 직후 선거 예측 발표’라는 오랜 염원 실현이란 기쁨을 만끽했다. 조지 갤럽 박사가 생존해 있다면 내가 드디어 해냈음을 달려가 자랑하고 싶었다. 벼랑 끝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들을 떠올리며 나에게 온 행운에 감사했다.
선거법 위반 공방과는 무관하게 선거 예측 과정과 여론조사에 대한 언론의 인터뷰, 학계의 자료 요청이 쇄도했다. ‘여론조사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는 명제와 마찬가지로, ‘여론조사 과정의 명확한 공개 없이는 여론조사와 민주주의 발전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수중의 자료를 공개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역사학자들이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 역사를 쓰고 정치·사회학자들이 선거 결과를 좀 더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1996년 1월, 나는 잘 팔릴 것이라 예상하지도 않았고 실제로도 잘 팔리지 않은 책을 냈다. 제1회 지방 선거여론조사 자료집 〈한국인의 투표행동〉, 국내 최초의 선거여론조사 자료집이다. 이후 지금까지 한국갤럽은 주요 선거 과정을 기록한 선거여론조사 자료집 11권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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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0년대 들어서는 전화조사원들이 바로 앞의 컴퓨터 모니터에 나타나는 질문을 보고 읽으며 키보드와 마우스로 응답 내용을 입력하는 CATI(computer assisted telephone interviewing) 시스템이 일반화됐다. 관리자나 담당 연구원들은 사무실 내 각자의 자리에서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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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론조사 TV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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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이후 우리나라 언론의 여론조사 결과 인용 보도는 정치, 사회, 라이프스타일, 산업별 실태 등 다방면에 걸쳐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리고 1995년 6월 27일,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자치 선거를 맞이했다.
MBC는 14대 대선에 이어 이번에도 한국갤럽에 선거 예측 조사를 의뢰했다. 나는 과거보다 더 큰 부담을 느꼈다. 대통령 선거는 당선자 한 사람만 맞추면 되지만, 지방자치 선거에서는 전국 15개 광역단체장을 맞춰야 한다. 대선 예측 15번을 동시에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지역별 조사 예산은 대선만큼 넉넉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선거 예측이야말로 조사회사의 역량이 어느 수준인지 가늠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각 지역에서 누가 당선할 것인지 맞추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초기 판세 분석에서 박빙 지역은 선거일 전까지 표본 1,000명 규모로 5~6회 정도 추적 조사하고, 1, 2위 후보 간 격차가 커서 당선자가 바뀔 가능성이 낮은 지역은 500명씩 2~3회만 조사하기로 했다. 이렇게 할 경우 대선보다 실제 득표율과 예측치 차이가 클 수밖에 없고, 지역에 따라 표본오차 범위를 크게 벗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사실상 득표율 예측은 포기한 차선책이었다. 제한된 예산, 인력, 자원으로 지방 선거에 출마한 모든 후보들의 실제 득표율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과욕(過慾)이었다.
1993년 말 우리나라 전화 보유율은 100명당 38대로 1가구 2전화 시대를 맞이했다. 휴대전화 가입자 수는 1995년 초 100만 명을 돌파했다.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선거일 전 면접조사를 능가하는 당일 투표자 전화조사의 효용을 경험했기에, 제1회 지방 선거 예측은 전화조사로만 계획했다.
당시 유권자들의 선거 관련 전화조사 응답 경향은 이러했다. 첫째, 후보 지지도를 묻는 질문에 50% 이상이 전화를 끊는다. 둘째, 선거 한 달 전까지도 유권자의 40%는 여전히 ‘아직 모르겠다, 말할 수 없다’고 답한다. 셋째, 응답을 하더라도 일부는 솔직하게 답하기를 꺼린다.
상황은 항상 유동적이다. 민심은 사회의 변화, 여론을 형성하고 전달하는 매체의 변화에 따라 계속 변한다. 조사에 대한 인식이나 응답 행태 역시 변한다. 과거에 적중했던 예측 방법이 이번에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이런저런 제약들 때문에 선거 예측이 빗나갔다고 말하는 것은 프로페셔널의 자세가 아니다. 그런 변명은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선거팀 사무실 벽에 ‘조사에서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문구를 큼지막하게 붙였다.
선거일 20일 전, 우리는 전화 250라인을 설치하고 매일 유효표본 4,000명 정도를 인터뷰했다. 임시로 마련한 100여 평의 공간에 150명 남짓한 전화조사원들이 오밀조밀 앉았다. 조사원들은 비슷한 톤으로 길어야 5분 정도 되는 인터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주의사항을 알리는 칠판에는 ‘최선을 당부합니다’라는 문구를 써놓았다. 조사원들을 감독하고 종이 응답지를 회수하는 데는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거의 전 직원이 돌아가며 전화조사실 지원에 나섰다.1)
1995년 6월 27일, 어김없이 D-day가 다가왔다. 전국 15개 시도 중 선거 당일까지 7개 지역이 박빙이었다. 선거일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전화조사원 350여 명을 동원해 투표자 1만여 명을 조사하기로 했다. 오전 11시까지는 투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사람이 많지 않아 조사원들은 쉴 새 없이 다이얼을 돌렸다.
MBC에 최종 예측 결과를 전달해야 할 시한은 오후 4시 30분. 나는 지난 대선 때처럼 TV 출연을 위해 오후 5시 30분까지 MBC에 도착해야만 했다. 오후 2시가 조금 지난 무렵, 지역별 데이터를 검토하던 허진재 연구원이 비명을 질렀다.
“악, 이게 뭐야! 제주도 1, 2위 순위가 바뀌었잖아!”
제주도는 전날까지 제주도지사를 역임한 무소속 신구범 후보가 1위, 2위는 민자당 우근민 후보로 예상됐다. 그런데 당일 투표자 조사에서 순위가 뒤바뀐 것이다. 허 연구원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반복 확인하면서 중얼거렸다.
“이거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일주일 동안 세 번 조사했을 때 신 후보가 1위였는데….”
제주도에서 막판 돌발사건이 있었는지 알아봤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같은 사무실 안에 있던 몇 명은 모두 당황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허 연구원이 갑자기 일어나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돌아온 그가 소리쳤다.
“소장님! 이런 일도 다 있네요. 제주 담당 조사원 한 명이 20명 응답을 모두 1번으로 해놨어요.”
1번은 민자당 후보였다. 한 조사원의 거짓을 찾아낸 것이다. 그 조사원은 왜 그랬을까? 우리의 예측이 틀리기를 바라는 누군가 보낸 첩자였을까? 선거 당일 경황이 없었던 우리는 이튿날 문제의 조사원을 추적했지만, 그가 제출한 이력서의 주소와 연락처는 거짓이어서 신원을 밝혀낼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다. 그 조사원의 얼굴만이 우리 연구원들의 뇌리에 남아 있을 따름이다.
오후 5시쯤 나는 최종 예측치를 담은 디스켓과 보고서를 들고 MBC로 향했다. 5시 50분부터 개표 방송에 출연해 이번 조사의 개요와 한계에 대해 설명하기로 되어 있었다. 방송 담당자에게 ‘이번에는 정말로 투표가 끝난 6시 정각에 선거 예측을 발표할 수 있는가’를 거듭 확인했다. 1992년 대선처럼 밤 12시에 선거 예측을 발표한 전례도 있고, 1995년에도 선관위는 여전히 방송사들에 선거 예측 발표를 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당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제167조(투표의 비밀보장) 2항은 ‘선거인은 투표한 후보자의 성명이나 정당명을 누구에게도 또한 어떠한 경우에도 진술할 의무가 없으며, 누구든지 선거일의 투표 마감 시각까지 이를 질문하거나 그 진술을 요구할 수 없다. 이를 위반할 경우, 제241조(투표의 비밀침해죄) 1항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6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되어 있었다.
당일 투표자 전화조사를 통해 선거 예측을 발표하는 것은 선거법 위반이었다. 그러나 조사업계나 방송업계, 선거 전문가들은 모두 그 법 조항이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비민주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물론, MBC도 법을 뛰어넘으려는 의지가 강했다. 특히 MBC는 그해 2월부터 고진(高進) 단장을 필두로 정치부 정예기자 5명이 선거기획단을 구성해 개표 방송을 치밀하게 준비해 온 터였다.
MBC에 도착하자마자 강성구 사장과 임원진이 모인 곳으로 갔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질문이 날아왔다.
“맞출 자신 있어요?”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차는 크더라도 순위는 맞출 수 있을 겁니다.”
나의 대답은 그들뿐 아니라 나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그들은 내게 선거 예측 조사에는 오차가 있고 1, 2위의 차이가 허용 오차 범위 안에 있을 땐 당락이 바뀔 수 있음을 시청자들이 명확히 알 수 있게 강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두 번째로 나간 MBC 개표 방송 스튜디오에는 엄기영, 정동영 두 앵커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시청자 여러분들이 일찍 주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개표 방송은 이런 말로 시작됐다. 오후 6시 15분, MBC는 한국갤럽의 투표자 전화조사를 근거로 ‘민자 5, 민주 4, 자민련 4, 무소속 2’라는 예상 판세를 보도했다. 우리나라 선거 역사상 처음으로 TV 개표 방송에서 선거 예측 결과를 발표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할애된 방송 시간 동안 세 번이나 되풀이해서 선거 예측과 오차의 의미를 설명했다.
투표함 1개를 개봉하기도 전에 TV가 전하는 선거 예측은 많은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선관위가 선거 예측 보도를 위법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MBC는 시청자에게 예고 방송을 하지 않았다. MBC의 19개 지방계열사들도 본사의 이런 계획을 전혀 몰랐다. 엄기영, 정동영 당시 개표방송 앵커들조차 방송 1시간 전 큐 시트를 받고서야 알게 됐다. 방송 내용을 주의 깊게 보지 않아 실제 개표 상황으로 착각한 일부 시청자들은 선관위나 언론사에 전화를 걸어 항의하기도 했다. 당시 여당이던 민자당은 초상집 분위기가 됐다. 자민련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야말로 ‘깜짝 TV쇼’가 연출됐다.
지역별 개표 상황은 밤 10시 무렵부터 우리 예측치와 점점 가까워졌다. 다음 날 새벽에야 당락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예상하고 따분한 개표 방송을 지켜보던 과거에 비하면 얼마나 산뜻한 방식인가. 일본 후지TV는 MBC 개표 방송을 일본 전역에 생중계했다. 최종 개표 결과, 한국갤럽의 15개 광역단체장 당선자와 후보자 순위 예측이 모두 적중했다. 각 후보자의 실제 득표율과 예측치 간 차이는 평균 3.7%포인트였다.
당시 선거 예측은 한국갤럽만 한 것이 아니었다. SBS-한국리서치 역시 오후 6시 선거 예측을 발표했다. 선거법 저촉을 우려해 선거 전날까지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예측치를 냈고, 한 지역(충북)에서 당선자 예측이 틀려 빛이 바랬다.
선거 다음 날부터 여러 언론들은 MBC-한국갤럽의 개표 방송과 선거 예측의 정확성을 다루는 한편, 적법성을 두고 뜨거운 공방을 벌였다. SBS는 선관위 유권해석에 따라 방송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선거 예측 보도를 하지 않은 KBS는 현행법상 출구조사는 위법이라며 MBC를 강하게 비판했다. 다음은 당시 적법성 여부에 대한 MBC-한국갤럽의 반박 논리다.
첫째, 당일 투표자 전화조사는 투표소 앞에서의 출구조사(Exit Poll)가 아니라 투표를 마친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한 전화조사다. 둘째, 선거 종료 후 결과를 발표했기 때문에 선거법 제108조 1항에 저촉되지 않는다. 셋째, 선거법 제167조 2항은 비밀 투표 보장을 위한 것이지 여론조사를 금지하는 내용이 아니다.
1995년 7월 21일, 헌법재판소는 1992년 제14대 대선 당시 여론조사 보도와 관련해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제소한 ‘선거 기간 동안의 여론조사발표금지 위헌’ 건을 기각한다는 결정 선고를 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선거법 개정 끝에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투표자 조사나 출구조사가 합법화됐다. 2005년부터는 여론조사 공표 금지 기간이 선거운동 기간 전체에서 선거일 6일 전으로 줄었다.
이런 갑론을박(甲論乙駁)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1987년과 1992년 불발된 ‘투표 종료 직후 선거 예측 발표’라는 오랜 염원 실현이란 기쁨을 만끽했다. 조지 갤럽 박사가 생존해 있다면 내가 드디어 해냈음을 달려가 자랑하고 싶었다. 벼랑 끝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들을 떠올리며 나에게 온 행운에 감사했다.
선거법 위반 공방과는 무관하게 선거 예측 과정과 여론조사에 대한 언론의 인터뷰, 학계의 자료 요청이 쇄도했다. ‘여론조사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는 명제와 마찬가지로, ‘여론조사 과정의 명확한 공개 없이는 여론조사와 민주주의 발전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수중의 자료를 공개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역사학자들이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 역사를 쓰고 정치·사회학자들이 선거 결과를 좀 더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1996년 1월, 나는 잘 팔릴 것이라 예상하지도 않았고 실제로도 잘 팔리지 않은 책을 냈다. 제1회 지방 선거여론조사 자료집 〈한국인의 투표행동〉, 국내 최초의 선거여론조사 자료집이다. 이후 지금까지 한국갤럽은 주요 선거 과정을 기록한 선거여론조사 자료집 11권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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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0년대 들어서는 전화조사원들이 바로 앞의 컴퓨터 모니터에 나타나는 질문을 보고 읽으며 키보드와 마우스로 응답 내용을 입력하는 CATI(computer assisted telephone interviewing) 시스템이 일반화됐다. 관리자나 담당 연구원들은 사무실 내 각자의 자리에서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