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발행 단행본 〈조사인으로 살다: 박무익 회고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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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매공원 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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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당시 우리나라 전국의 가구 전화 보유율은 70% 수준, 대도시 서울도 80%가 채 안 됐기 때문에 선거 예측을 위한 기본 자료 수집 방법으로는 가구 방문 면접조사를 채택했다. 전국 면접조사를 신속하게 완료하기 위해 5개 도시 실사조직망을 보완했다. 실사 과정에서는 무엇보다 표본의 왜곡을 가장 경계했다. 어떤 경우에도 무작위 표본추출로 선정된 조사지점과 응답자 선정 원칙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전화 보유율이 비교적 높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화조사도 병행했다. 면접조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표본 대표성은 낮지만 돌발 사건이 발생할 경우 좀 더 빨리 민심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다. 외국에서 선거 예측에 활용한다는 출구조사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9월 중순, 사내 선거조사팀을 조직했다. 이흥철, 마동훈, 김준한, 이영미 등 연구원 4명, 이정란, 이연희 등 문서 제작 담당 2명. 대학원에서 실험심리학을 전공하고 조사 실무를 하면서도 늘 학구적 태도로 방법론을 고심하던 이흥철이 팀장을 맡았다. 보안 유지를 위해 광화문에 별도의 오피스텔을 마련해 사무실로 삼았고 출입 인원을 제한했다.
거실은 전산처리와 제작을 위한 컴퓨터, 프린터, 복사기, 전동 타자기로 채워졌다. 방 두 개 중 하나는 연구원들의 작업실, 다른 하나는 휴식 겸 수면 공간이 됐다. 그때 기준으로 최첨단 고가 장비들을 갖추고도 자료 수집 후 최종 보고서 완성까지는 최소 열흘이 걸렸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매 조사의 추세는 상당히 안정적이고 일관성 있었다. 특히 정국 변화에 대한 반응이 일주일 정도 시차를 두고 조사 결과에 뚜렷이 반영되는 것을 보며 나는 조사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1987년 9월 말 여야 합의 하에 제13대 대통령 선거 공식 선거운동 기간은 30일로 정해졌다.1)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1노(盧) 3김(金)’ 구도는 유권자들의 관심을 뜨겁게 달구었지만, 당시는 선거운동 기간 중 모의투표, 인기투표를 포함한 여론조사 결과 발표나 언론 보도가 법으로 금지됐다.2) 즉 유권자들은 선거일 한 달 전부터 어느 후보가 얼마나 앞섰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선거 과정이 여론조사 공표 금지라는 암막(暗幕)에 가려 유권자들은 어둠 속에서 후보들이 외치는 소리만 들어야 했다.
선거운동 기간에 돌입하자 모든 후보가 자신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주장의 근거는 자체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였다. 법적으로 구체적인 조사방법이나 수치를 공개할 수 없었고, 또 선동하는 입장에선 그럴 필요도 없었기에 실체를 알 수 없는 여론조사는 이용하기 좋은 소재였다. 저마다 선두라는 억지 주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후보가 우열을 가리기 힘든 ‘백중세(伯仲勢)’라는 식으로 바뀌었다. 언론 보도와 달리, 우리 조사에서 각 후보의 순위는 일찌감치 정해진 양상을 보였다. 특히 10월부터 선거일까지 1위와 4위는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복병(伏兵)을 만나기도 했다. 11월 10일, 정승화 前 육군참모총장이 야당인 민주당에 입당했다. 그의 입당은 군 출신인 노태우 후보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때까지 안정적이던 후보들의 지지도에도 약간 변화가 있어 나 역시 당혹스러웠다.
11월 30일 보도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 또한 변수였다.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우고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여객기가 미얀마 상공에서 사라져 버린 이 사건은 며칠 뒤 북한의 테러로 밝혀졌다. 일각에서는 대선을 앞두고 안보 불안감을 자극하기 위해 여당 측이 꾸민 음모라는 소문이 돌았다.
선거일이 가까워지자 후보들의 경쟁은 대규모 동원 유세로 이어졌다. 12만 평 규모로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었던 여의도광장에서는 11월 29일 김대중 후보, 12월 5일 김영삼 후보, 12월 12일 노태우 후보가 차례로 유세를 펼쳤다. 각 후보의 유세 때마다 백만여 인파가 모여들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다.3)
언론은 ‘모여든 군중 수가 그 후보에 대한 지지도’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특정 후보의 유세를 두고 어떤 언론사는 100만, 다른 언론사는 70만 명으로 전하기도 해 후보 진영에서는 규모를 작게 보도한 언론사를 적대시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자 어떤 신문은 군중 수 계산법을 게재하기도 했다.
언론이 여러 후보의 대규모 유세를 백중세로 보도하던 즈음, 우리 조사 결과에서는 각 후보 지지도가 유세 전과 거의 변동이 없었다. 유세장 인파는 당원이거나 동원된 사람들, 또는 기존 지지자들이 대부분이구나 싶었다.
대규모 유세가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면 지지후보를 결정하지 않았거나 조사에서 응답하지 않는 의견 유보자, 즉 부동층(浮動層)에서 어떤 변화가 나타나야 할 텐데 우리 조사 결과에서 각 후보 지지도는 너무도 안정적이었다. 선두는 노태우, 2위 김영삼, 3위 김대중, 4위 김종필. 이들의 순위는 좀처럼 바뀌지 않을 것 같았다.
1987년 12월 4일 조사에서는 노태우 후보 33.7%, 김영삼 후보 29.2%로 1, 2위 지지도 격차가 4%포인트대로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막바지에 이 둘은 역전될 것인가? 표본오차 이내의 차이를 보인다면 발표를 하지 말아야 하나? 표본오차 이내의 차이라면 당선자를 맞추지 못할 수도 있는데 선거 예측, 여론조사, 표본오차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사회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예측이 맞지 않을 경우 선거에 패한 쪽이 부정 선거를 주장하며 그 증거로 한국갤럽의 예측 결과를 내세울 가능성도 있었다.
투표일이 가까워질수록 유세장마다 흑색선전이 난무했고 믿거나 말거나 식의 유인물이 나돌았다. 야당 후보들은 ‘선거 당일 투표, 개표 때 여러분의 표를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과거 선거에 있었던 투표함 바꿔치기 같은 부정행위를 막아야 한다는 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근소한 표 차이로 질 경우 순순히 승복하지 않겠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대도시 곳곳에서는 유세장을 중심으로 폭력 사태도 발생했다. 각목을 든 청년들이 패싸움을 벌이는가 하면 돌이나 벽돌 조각들이 날아와 시민과 기자, 경찰들까지 부상을 입는 사건, 화염병과 사제폭발물이 터지는 사고도 있었다. 한 유세장에서는 차량이 전복되고 불타는 일까지 발생하는 등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이런 난동은 유세장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선거운동원의 집에는 한밤에 화염병이 날아들기도 했다. 유권자의 집에는 거짓 선심 전화가 걸려왔다. 지역마다 술과 음식, 공짜 관광이 제공됐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선물과 돈봉투도 돌았다. 선거가 끝난 뒤 사후 점검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러한 부정 선거운동은 후보자의 당락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왜 각 후보 진영은 그토록 무리를 한 것일까? 제대로 된 여론조사로 지지도 변화를 읽으며 선거운동을 했다면 좀 달랐을까?
선거일 열흘 전쯤, 평소 친분이 있던 금성사(LG전자의 전신) 이은준 상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朴 형, 누가 이길 것 같소?”
“현재까지는 노(盧)가 앞서고요, 그런 추세가 계속될 것 같은데요.”
“朴 형, 정신 나갔소? 우리 그룹에서 직원 4천 명이 모의투표를 했는데 YS가 50%, DJ가 25%, 노가 25%인데 어찌 그렇소?”
그는 불신하는 투로 전화를 와락 끊어버렸다.
선거일 사흘 전인 12월 13일, 서울 대방동 보라매공원에서 김대중 후보의 마지막 대규모 유세가 열렸다. 가볼까, 말까? 우리 조사에서 그가 당선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결국 가보기로 했다. 영하 10도에 가까운 날씨였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제 군사독재자의 심판은 끝났다!”
“옳소!”
“이제 노가리는 비행기 타고 하와이로 도망가야 해!”
“도망가게 내버려 두다니, 당장 재판장에 세워 사형해야 해!”
노점에서 소주를 팔던 장사꾼도 함께 격분했다. 군중들의 열기는 광기 그 자체로 느껴졌다. 유세 중간에 사람들을 헤치며 빠져나오는데 등 뒤 연단에서 이런 외침이 들려왔다.
“12월 17일 저녁 7시, 개표가 완료된 후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 서울역에 모입시다! DJ의 당선을 축하합시다! 만일 떨어진다면 그것은 부정 선거입니다. 부정 선거를 규탄합시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들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지 않을 것이라는 선거 예측 결과를 발표하면 나는 맞아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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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6년 현재 공직선거법 제33조(선거 기간)에 의하면 대통령 선거 기간은 23일,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기간은 14일이다.
2) 2000년대 들어서도 전체 선거 기간 중 여론조사 결과 공표가 금지되다가 2005년 공직선거법 제108조(여론조사의 결과 공표 금지 등)가 개정되면서 선거일 전 6일부터 선거일까지만 공표 금지하는 것으로 완화됐다. 그러나 관련 학계와 조사업계는 이러한 제한의 철폐를 주장하고 있다.
3) 5년 뒤인 1992년에는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과열 선거를 막기 위해 대규모 유세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고, 1997년에는 TV 합동 토론회가 시작됐다. 여의도광장은 1999년 1월 공원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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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매공원 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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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당시 우리나라 전국의 가구 전화 보유율은 70% 수준, 대도시 서울도 80%가 채 안 됐기 때문에 선거 예측을 위한 기본 자료 수집 방법으로는 가구 방문 면접조사를 채택했다. 전국 면접조사를 신속하게 완료하기 위해 5개 도시 실사조직망을 보완했다. 실사 과정에서는 무엇보다 표본의 왜곡을 가장 경계했다. 어떤 경우에도 무작위 표본추출로 선정된 조사지점과 응답자 선정 원칙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전화 보유율이 비교적 높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화조사도 병행했다. 면접조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표본 대표성은 낮지만 돌발 사건이 발생할 경우 좀 더 빨리 민심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다. 외국에서 선거 예측에 활용한다는 출구조사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9월 중순, 사내 선거조사팀을 조직했다. 이흥철, 마동훈, 김준한, 이영미 등 연구원 4명, 이정란, 이연희 등 문서 제작 담당 2명. 대학원에서 실험심리학을 전공하고 조사 실무를 하면서도 늘 학구적 태도로 방법론을 고심하던 이흥철이 팀장을 맡았다. 보안 유지를 위해 광화문에 별도의 오피스텔을 마련해 사무실로 삼았고 출입 인원을 제한했다.
거실은 전산처리와 제작을 위한 컴퓨터, 프린터, 복사기, 전동 타자기로 채워졌다. 방 두 개 중 하나는 연구원들의 작업실, 다른 하나는 휴식 겸 수면 공간이 됐다. 그때 기준으로 최첨단 고가 장비들을 갖추고도 자료 수집 후 최종 보고서 완성까지는 최소 열흘이 걸렸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매 조사의 추세는 상당히 안정적이고 일관성 있었다. 특히 정국 변화에 대한 반응이 일주일 정도 시차를 두고 조사 결과에 뚜렷이 반영되는 것을 보며 나는 조사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1987년 9월 말 여야 합의 하에 제13대 대통령 선거 공식 선거운동 기간은 30일로 정해졌다.1)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1노(盧) 3김(金)’ 구도는 유권자들의 관심을 뜨겁게 달구었지만, 당시는 선거운동 기간 중 모의투표, 인기투표를 포함한 여론조사 결과 발표나 언론 보도가 법으로 금지됐다.2) 즉 유권자들은 선거일 한 달 전부터 어느 후보가 얼마나 앞섰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선거 과정이 여론조사 공표 금지라는 암막(暗幕)에 가려 유권자들은 어둠 속에서 후보들이 외치는 소리만 들어야 했다.
선거운동 기간에 돌입하자 모든 후보가 자신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주장의 근거는 자체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였다. 법적으로 구체적인 조사방법이나 수치를 공개할 수 없었고, 또 선동하는 입장에선 그럴 필요도 없었기에 실체를 알 수 없는 여론조사는 이용하기 좋은 소재였다. 저마다 선두라는 억지 주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후보가 우열을 가리기 힘든 ‘백중세(伯仲勢)’라는 식으로 바뀌었다. 언론 보도와 달리, 우리 조사에서 각 후보의 순위는 일찌감치 정해진 양상을 보였다. 특히 10월부터 선거일까지 1위와 4위는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복병(伏兵)을 만나기도 했다. 11월 10일, 정승화 前 육군참모총장이 야당인 민주당에 입당했다. 그의 입당은 군 출신인 노태우 후보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때까지 안정적이던 후보들의 지지도에도 약간 변화가 있어 나 역시 당혹스러웠다.
11월 30일 보도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 또한 변수였다.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우고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여객기가 미얀마 상공에서 사라져 버린 이 사건은 며칠 뒤 북한의 테러로 밝혀졌다. 일각에서는 대선을 앞두고 안보 불안감을 자극하기 위해 여당 측이 꾸민 음모라는 소문이 돌았다.
선거일이 가까워지자 후보들의 경쟁은 대규모 동원 유세로 이어졌다. 12만 평 규모로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었던 여의도광장에서는 11월 29일 김대중 후보, 12월 5일 김영삼 후보, 12월 12일 노태우 후보가 차례로 유세를 펼쳤다. 각 후보의 유세 때마다 백만여 인파가 모여들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다.3)
언론은 ‘모여든 군중 수가 그 후보에 대한 지지도’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특정 후보의 유세를 두고 어떤 언론사는 100만, 다른 언론사는 70만 명으로 전하기도 해 후보 진영에서는 규모를 작게 보도한 언론사를 적대시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자 어떤 신문은 군중 수 계산법을 게재하기도 했다.
언론이 여러 후보의 대규모 유세를 백중세로 보도하던 즈음, 우리 조사 결과에서는 각 후보 지지도가 유세 전과 거의 변동이 없었다. 유세장 인파는 당원이거나 동원된 사람들, 또는 기존 지지자들이 대부분이구나 싶었다.
대규모 유세가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면 지지후보를 결정하지 않았거나 조사에서 응답하지 않는 의견 유보자, 즉 부동층(浮動層)에서 어떤 변화가 나타나야 할 텐데 우리 조사 결과에서 각 후보 지지도는 너무도 안정적이었다. 선두는 노태우, 2위 김영삼, 3위 김대중, 4위 김종필. 이들의 순위는 좀처럼 바뀌지 않을 것 같았다.
1987년 12월 4일 조사에서는 노태우 후보 33.7%, 김영삼 후보 29.2%로 1, 2위 지지도 격차가 4%포인트대로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막바지에 이 둘은 역전될 것인가? 표본오차 이내의 차이를 보인다면 발표를 하지 말아야 하나? 표본오차 이내의 차이라면 당선자를 맞추지 못할 수도 있는데 선거 예측, 여론조사, 표본오차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사회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예측이 맞지 않을 경우 선거에 패한 쪽이 부정 선거를 주장하며 그 증거로 한국갤럽의 예측 결과를 내세울 가능성도 있었다.
투표일이 가까워질수록 유세장마다 흑색선전이 난무했고 믿거나 말거나 식의 유인물이 나돌았다. 야당 후보들은 ‘선거 당일 투표, 개표 때 여러분의 표를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과거 선거에 있었던 투표함 바꿔치기 같은 부정행위를 막아야 한다는 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근소한 표 차이로 질 경우 순순히 승복하지 않겠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대도시 곳곳에서는 유세장을 중심으로 폭력 사태도 발생했다. 각목을 든 청년들이 패싸움을 벌이는가 하면 돌이나 벽돌 조각들이 날아와 시민과 기자, 경찰들까지 부상을 입는 사건, 화염병과 사제폭발물이 터지는 사고도 있었다. 한 유세장에서는 차량이 전복되고 불타는 일까지 발생하는 등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이런 난동은 유세장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선거운동원의 집에는 한밤에 화염병이 날아들기도 했다. 유권자의 집에는 거짓 선심 전화가 걸려왔다. 지역마다 술과 음식, 공짜 관광이 제공됐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선물과 돈봉투도 돌았다. 선거가 끝난 뒤 사후 점검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러한 부정 선거운동은 후보자의 당락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왜 각 후보 진영은 그토록 무리를 한 것일까? 제대로 된 여론조사로 지지도 변화를 읽으며 선거운동을 했다면 좀 달랐을까?
선거일 열흘 전쯤, 평소 친분이 있던 금성사(LG전자의 전신) 이은준 상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朴 형, 누가 이길 것 같소?”
“현재까지는 노(盧)가 앞서고요, 그런 추세가 계속될 것 같은데요.”
“朴 형, 정신 나갔소? 우리 그룹에서 직원 4천 명이 모의투표를 했는데 YS가 50%, DJ가 25%, 노가 25%인데 어찌 그렇소?”
그는 불신하는 투로 전화를 와락 끊어버렸다.
선거일 사흘 전인 12월 13일, 서울 대방동 보라매공원에서 김대중 후보의 마지막 대규모 유세가 열렸다. 가볼까, 말까? 우리 조사에서 그가 당선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결국 가보기로 했다. 영하 10도에 가까운 날씨였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제 군사독재자의 심판은 끝났다!”
“옳소!”
“이제 노가리는 비행기 타고 하와이로 도망가야 해!”
“도망가게 내버려 두다니, 당장 재판장에 세워 사형해야 해!”
노점에서 소주를 팔던 장사꾼도 함께 격분했다. 군중들의 열기는 광기 그 자체로 느껴졌다. 유세 중간에 사람들을 헤치며 빠져나오는데 등 뒤 연단에서 이런 외침이 들려왔다.
“12월 17일 저녁 7시, 개표가 완료된 후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 서울역에 모입시다! DJ의 당선을 축하합시다! 만일 떨어진다면 그것은 부정 선거입니다. 부정 선거를 규탄합시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들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지 않을 것이라는 선거 예측 결과를 발표하면 나는 맞아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1) 2016년 현재 공직선거법 제33조(선거 기간)에 의하면 대통령 선거 기간은 23일,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기간은 14일이다.
2) 2000년대 들어서도 전체 선거 기간 중 여론조사 결과 공표가 금지되다가 2005년 공직선거법 제108조(여론조사의 결과 공표 금지 등)가 개정되면서 선거일 전 6일부터 선거일까지만 공표 금지하는 것으로 완화됐다. 그러나 관련 학계와 조사업계는 이러한 제한의 철폐를 주장하고 있다.
3) 5년 뒤인 1992년에는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과열 선거를 막기 위해 대규모 유세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고, 1997년에는 TV 합동 토론회가 시작됐다. 여의도광장은 1999년 1월 공원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