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발행 단행본 〈조사인으로 살다: 박무익 회고록〉에서 발췌
조사인의 양심
2013년 초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다가 중간에 영화관을 나왔다. 계급 간 대립 구도, 부조리한 사회 구조가 약자를 양산한다는 주장이 지나치게 강조됐고, 기존 법 체제를 극악무도한 것으로 몰아가는 식의 표현이 반복돼 마음이 불편했다. 물론 우리 회사나 내 주위에는 그 영화를 매우 감동적으로 봤다는 사람들이 절대다수다.
나의 그러한 불편함은 순수한 영화관람객 입장이 아니라, 조사인의 시각에서 영화를 봤기 때문이지 싶다. 대부분의 소설과 영화는 그 시대의 일면이나 특정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조사인은 질문지를 제대로 만들고 현상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 사회의 구조와 이 시대의 현상을 균형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 연구원들에게도 늘 현실 인식에 언제나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를 당부하며, 나는 카를 포퍼(Karl Popper)의 책을 추천한다. 그는 양극단을 경계하고 ‘우리는 모두 틀릴 수 있다’는 인식론을 주장하며 법과 제도를 점진적으로 개혁해 나갈 것을 제안했다. 약자 보호나 독점 규제 등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지만, 조사인이 반드시 알아야 할 철학자를 한 명만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카를 포퍼를 답할 것이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는 얼핏 보면 여야 어느 후보의 주장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경제민주화나 복지 관련 공약들이 쏟아졌다. ‘공약은 꼭 지킨다’는 소신을 앞세운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국회에서는 경제민주화 법안들이 연이어 통과됐다.
공약이 법안으로, 정책으로 만들어지고 실제 집행되는 과정을 보며 우리 사회가 격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아무리 선한 의도로 만들어진 정책이라 해도 실행 과정에서는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0~5세 무상보육, 무상교육 정책이 바로 그런 예다. 정부가 주도해 도입했으나 많은 기초단체들은 재정난으로 아우성칠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재정자립도가 높은 서울시마저 양육수당 지급 중단 위기까지 갔었다.
새로운 법안 발의 과정에서 여론조사는 필수 요소다. 하지만 여론조사에서 정책 수혜자 입장에 유리한 사실만 제시하고 찬반을 묻는다면 그 결과는 여론의 반쪽만 보여줄 뿐이다. 예컨대 ‘대체휴일제 도입’ 이슈에 대해 조사인은 단순히 ‘더 놀면 좋지’ 하고 스치듯 생각해선 안 된다. 여론조사를 기획하는 조사인에게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개인의 이념 성향이나 관심사가 아니라 조사인의 양심에 준해 여론조사를 수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조사인의 양심(良心)이란 무엇인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사회 보통 사람들의 ‘보편적 상식(common sense)’, 다시 말해 절대 선이나 절대 악, 보수나 진보 어느 한 편이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시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가끔 우리 연구원들에게 묻는다. 요즘 갑론을박(甲論乙駁)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이슈 세 가지를 바로 말할 수 있는가? 각 이슈의 양극단에 있는 이들의 주장과 근거는 알고 있는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면 조사인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마케팅조사라고 예외는 아니다. 기업의 마케팅 활동과 사회적 이슈는 어떤 형태로든 연결된다. 조사인이 아니라 시대정신(時代精神, zeitgeist)을 중시하는 지성인(知性人), 또는 민주시민(民主市民)을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새롭게 거론되는 법안의 장단점을 여러 각도에서 두루 살피는 자세가 필요하다.
세상 돌아가는 일을 접하기엔 방송 뉴스도 좋지만, 신문 기사를 볼 때 숙고(熟考)할 여지가 더 많아진다. 완결성 있는 텍스트(text)로 제공되기 때문이다. 평소 즐겨보는 신문이 있다면 그와 상반되는 논조를 지닌 신문도 같이 볼 것을 추천한다. 1면과 주요 기사의 헤드라인도 중요하지만 사설도 꼼꼼히 읽어보길 바란다. 신문은 단순한 소일거리가 아니다. 보편적 상식과 시대정신을 습득할 수 있는 학습 교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