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담(調査談)

● 2017년 발행 단행본 〈조사인으로 살다: 박무익 회고록〉에서 발췌

동그란 하늘

우물 안에서 본 하늘은 동그랗다. 때로는 파랗고, 희고, 회색이거나 심지어 붉기도 하며 때로는 칠흑이다. 그 하늘에서 비가 오고, 우박이 떨어지고, 눈이 내린다. 항상 똑같은 해보다 매일 조금씩 사위어가는 달이 있는 밤이 더 좋다.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흐르는 은하수를 보여주고, 그에 얽힌 낭만적인 신화를 들려주며 예쁜 상상을 권하는 하늘은 더더욱 좋을 것만 같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보는 하늘은 동그란 하늘이 아니다. 산과 들, 고층 건물이 만드는 스카이라인 등 모든 사람들은 각각 다른 하늘을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동그랗다는 누군가의 끊임 없는 속삭임 탓에 어느덧 우리는 하늘이 동그랗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1988년 초 한국갤럽이 주관한 4개국 비교 조사 결과는 ‘한국 국제 이미지 너무 나쁘다’라는 헤드라인 하의 기사로 공개됐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에 사는 사람들에게 비친 한국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얼룩져 있었다. 한국을 생각할 때 그들이 먼저 떠올리는 단어는 ‘한국전쟁’, ‘저개발’, ‘군부독재’, ‘분단국’ 등 부정적인 것들이 많았다. 또한 ‘한국은 살기 좋은 나라인가’라는 질문에 네 나라 국민 중 55%가 ‘좋지 않다’고 답했다. ‘좋다’는 응답은 15%에 그쳤고 나머지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엉터리 통계 수치란 말인가?”
기사가 나간 후 우리는 한동안 항의 전화에 시달렸다. 잘못된 조사로 한국인의 자존심을 훼손하고 국격을 떨어뜨렸다며 비난받았다. 이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맨 처음 조사 결과를 본 조선일보 편집인들 역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부는 공개하기 어렵지 않나 하는 입장도 내비쳤지만, 결국 조사 결과는 예정대로 기사화됐다. 당시 우리 사회의 지식층이던 언론인조차 느낄 수밖에 없었던 그 괴리감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아침저녁 TV 뉴스는 한국에 대한 외국의 시각을 주로 이렇게 전했다.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우리 한국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경제 발전 일로에 있는 나라로….”
어쩌다 외국 언론이 한국을 좋게 다룬 기사가 나오면 국내 언론은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인용 보도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국민이 실제보다 더 우쭐함을 느끼도록 했을 법하다. 한국갤럽 조사 결과는 그동안 우리가 믿어온 것과 달리 실제로는 세계 속 한국 위상이 보잘것없고, 우리가 자랑스레 여기는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외국인의 눈에는 그렇게 비치지 않는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사람들은 과거 언론 보도가 왜곡됐거나 조사 결과가 잘못됐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쏟아진 항의로 미루어보면 전자보다는 후자가 많았던 것 같다.

냉철하게 1980년대를 되돌아보면 한국만큼 세계 언론에 큰 토픽을 자주 제공한 나라도 드물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KAL기 추락, 아웅산 테러, 군부독재에 맞서는 민주화 투쟁 등 국가 이미지 제고에 결코 도움되지 않을 사건들이 연속해서 일어났다. 다시 말해 외국인들이 한국을 아름다운 나라로 인식할 만한 계기가 많지 않았다.

외국의 소식을 직접 접하기 어렵고 해외여행도 자유롭지 않았던 그 시절. 한국이 아르헨티나, 싱가포르, 태국 같은 나라들보다 외국인 눈에 더 좋게 비친다고 믿게 된 데는 언론의 책임이 적지 않았다고 본다. 언론을 그렇게 만든 것은 결국 위정자(爲政者)였다.
이데올로기나 종교의 속성이 대부분 그러하듯 나치즘, 파시즘, 마르크시즘 신봉자들이 했던 첫 번째 일은 하늘이 동그랗다고 믿게 하는 일이었다. 원래 의도가 그랬든 아니든 간에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들어 일시적 환희나 환각 속에 가두곤 했다. 하지만 그런 눈가림이 결코 오래가지 못함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그 조사 결과의 여파는 한국관광공사에까지 다다랐다. 관광공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원더풀 코리아’인데 한국갤럽 조사 결과는 좀 이상하지 않는가 하는 문의를 받았다. 어떻게 조사했는지 알아보니 공항이나 호텔에서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외국인에게 ‘한국에 대한 인상 한 마디’ 식으로 물었다고 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이전의 한국은 동양의 작은 분단국가에 불과했다. 그런 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이 과연 당시 세계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관광공사 측에 기존 조사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정확한 자료를 토대로 정책을 세워야만 외국에서의 한국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관광공사는 나의 의견에 수긍하며, 그 주제로 사보에 실을 기고문을 요청했다. 나는 글에서 ‘올림픽은 세계인에게 한국의 좋은 이미지를 각인할 절호의 기회이며, 그런 이미지 전환은 우리가 기존의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해야만 가능하다’는 취지를 피력했다.

이를 계기로 관광공사는 국내 장기 체류 외국인의 여행과 여가 실태 조사를 한국갤럽에 의뢰했다. 오늘날 관광공사는 외래 관광객의 한국 여행 실태와 우리 국민의 국내외 여행 실태를 매년 조사하고, 각종 출입국·관광수입 통계는 매월 단위로 공개한다. 또한 러시아와 중국은 이제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곳이 된 지 오래다. 처음으로 시도했던 해외 조사 경험과 비교하면 격세감(隔世感)과 함께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