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6월 17일 설립 40주년 기념 단행본 〈한국갤럽의 어제와 오늘〉에서 발췌
德不孤必有隣(덕불고필유린)
- 조성겸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한국갤럽을 처음 방문한 것은 90년대 초반이었다. 선거 여론조사에 관한 글을 쓰면서 자료가 필요해 갤럽을 찾았는데 출입문 앞에 붙어 있던 대통령 선거 예측조사 결과가 보였다. 그때 한국갤럽이 국내 최초로 예측조사를 실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 지난 25년 동안 때로는 자료를 구하는 평범한 연구자로서, 때로는 자문 교수나 공동 연구자, 학회 임원으로서 참으로 다양하게 갤럽과 인연을 맺어왔다.
직업의 특성상 어찌하다 보니 갤럽뿐만 아니라 한국의 다른 많은 조사회사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갤럽은 다른 조사회사와는 다른 그 무엇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사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영리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소명의식 아니면 책임감과 같은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론 동향에 관한 사실(fact)을 찾아내서 사회에 제공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사실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은 조사회사의 기본적인 기능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사회조사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러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치열한 경쟁 환경에서 이를 실제로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쉽지 않은 일을 토종기업인 한국갤럽이 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독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매주 실시되어 공개되는 갤럽 데일리 조사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갤럽 데일리 조사는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되는 주요 사회이슈에 대한 여론 동향이나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조사해서 알려 줌으로써 한국 사회의 ‘만인의 지혜’를 높여나간다. 조사회사로서 사회적 책임을 나름의 방법으로 조용히 실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주변의 지인들이 내게 자주 묻는 질문 중 하나는 갤럽 데일리 조사 비용에 관한 것이다. 갤럽 자체 부담으로 조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모두들 놀란다.
한국갤럽은 선거가 끝날 때마다 관련 여론조사 자료를 자료집으로 묶어낸다. 기업에서 발간하는 자료집이니 만큼 잘한 면을 좀 더 부각시킬 만도 한데 갤럽 자료집을 보면 그렇지 않다. 제3자가 작성한 것처럼 담담하게 사실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점이 조사회사로서 갤럽이 갖는 매력 중에 하나인 것 같다. 또 갤럽은 선거 때마다 자체 기획조사를 실시하고 이에 대한 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시민으로서도 유용한 정보겠지만 연구자로서는 더없이 고마운 자료다.
사회조사에서 중요한 부분의 하나가 과학적 조사 방법의 개발이다.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상에 맞게 과학적 조사원칙을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 역시 달라져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조사학계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런데 조사학계는 다른 여타 학문 분야에 비해 연구 여건이 좋지 않다. 우선 자료를 구하기 쉽지 않다. 연구자가 직접 조사를 수행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든다. 조사회사에 자료를 요청하면 조사 자료는 의뢰자 소유이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처럼 순수한 학문적 연구를 위한 경우에도 자료 획득은 쉽지 않다. 이런 면에서 한국갤럽이 조사연구학술상 후원 등 조사연구학회를 지원하고 있는 것은 척박한 연구 환경의 연구자에게 큰 힘이 된다. 이와 더불어 한국갤럽은 자체적으로 조사한 자료를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연구자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학계에 대한 조사 업계의 기대는 적지 않다. 조사회사 사람들을 만나면 조사 방법상의 산적한 문제를 학계가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 학술연구에 대한 지원은 한국 조사업의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조사연구학회가 없었다면 조사에 관한 다양한 학술적 연구가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조사업계의 대응도 좀 더 어려웠을 것으로 감히 생각한다. 나름대로 지난 10여 년간 많은 연구자들이 새로운 조사 방법을 위한 대안을 연구해 왔고, 또 이러한 연구결과를 토론해 왔다. 갤럽은 한국에서 조사를 처음으로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학술연구에 대한 후원을 통해 조사업계의 장기 발전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한국갤럽의 자료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느낀 것은 과학적 원칙에 대한 존중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조사 방법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요즘처럼 혁명적 변화가 이루어진 적은 없는 것 같다. 가히 조사 방법의 혼란기라고도 볼 수 있는데 유감스러운 것은 과학적 원칙보다는 현실적 제약에 따라 타협점을 찾는 것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처럼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흔히 과학적 원칙은 조사의뢰자가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지켜봤자 소용이 없다는 말을 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갤럽과 같이 성공적인 기업이 조사원칙을 준수한다는 것은 조사 전문가들의 자부심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제대로 기본을 잘 하는 것이 곧 시장에서의 성공을 가져온다는 사례를 보여줌으로써 한국 조사업의 질적 발전에도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상호 신뢰가 절실하다. 믿음은 말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을 통해 쌓여 나가는 것이다. 한국갤럽은 ‘사실 제공’이라는 나름의 소명의식을 갤럽 데일리, 자료집 발간, 자료 공개, 과학적 원칙의 존중, 학계 후원 등 많은 행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를 통해 갤럽은 신뢰 받는 조사회사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또한 갤럽이 거둔 사업적 성공의 핵심적인 밑바탕이 되었다. 하나의 기업으로서 생존하는 방법은 단순히 시장의 논리만을 추구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 한국갤럽은 사회적 책임을 다함으로써 오히려 시장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좋은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이는 한국조사업계의 질적 제고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조사 방법은 커다란 위기에 처해 있다. 전통적인 방법의 타당도는 떨어지고 있는데 반해 새로운 대안적 방법들이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별 조사회사 차원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업계와 학계의 상호 협력이 더욱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갤럽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해 본다. 德不孤 必有隣(덕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이 있으므로 외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