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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담(調査談)

한국갤럽, 조사인, 조사 이야기

〈조사인으로 살다〉 사직동 208번지 #ep.39
2024/05/07
● 2017년 발행 단행본 〈조사인으로 살다: 박무익 회고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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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동 20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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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어디 이런 곳이 있으랴.

북한산의 최고봉인 보현봉(普賢峰), 청와대를 품고 있는 북악산(北岳山), 호랑이가 살았다는 인왕산(仁王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 仁王마루.

무엇보다 푸른 하늘, 하얀 구름, 신선한 공기가 가까이 있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란 별천지, 샹그릴라보다 더 속 시원한 곳 - 仁王마루.

답답할 때, 우울할 때 올라가 보자.
펀치 볼이라도 팡 하고 한 번 쳐보자.
우리의 靑春도 얘기해보자.
고뇌, 번민, 불면, 말 못할 속사정, 苦痛까지도 털어놔보자.
타 부서 사람들과도 어울려 섞이고 지지고 볶으면서 작은 因緣을 만들어 보자꾸나.
우리가 이곳에 살아가는 동안에.”


2007년 11월 회사 건물 옥상을 재정비하고 인트라넷에 올린 글이다. 인왕마루는 한국갤럽 건물의 옥상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다. 모 호텔 지배인이 우리 옥상에 와 보고 ‘카페 만들면 정말 좋겠다’고 한 뒤로, 작게나마 그러한 휴식 공간을 만들고자 욕심을 내봤다. 하지만 고도 제한이 있는 동네라 증축이나 가건물 시공은 불가했다.

그래서 사방 담벼락에 발랄한 벽화를 그려넣고, 갖가지 꽃나무를 심어 정원으로 꾸몄다. 한편에는 각종 운동기구를 비치하고 그 옆에 세운 정자(亭子)에는 ‘인왕마루’라는 현판도 걸었다. 이후로는 매년 첫 근무일에 우리는 건물 옥상 ‘인왕마루’에서 시무식을 한다. 한파가 와도, 함박눈이 쏟아져도 전 직원이 한데 모여 건배하고, 전원이 돌아가며 서로의 손을 맞잡고 덕담을 나누는 것으로 새해를 시작한다.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 208번지, 새 도로명 주소로는 사직로 70. 이 건물은 지난 2001년 1월 9일 법원 경매를 통해 낙찰받아 한국갤럽 소유가 됐다.

나는 1974년 종로2가 경영빌딩에서 창업했고, 1981년부터 같은 종로구 내 사직동 221번지 고려빌딩으로 옮겨 10년 넘게 머물렀다. 그런데 1990년대 초 인근 지역 재개발이 확정됐다. 건물주가 바뀌면서 갑자기 직원 80명을 이끌고 갈 만할 곳을 찾아야만 했다. 다행히 지인 소개로 1994년 강남구 신사동의 두원빌딩 5층과 6층을 빌려 입주할 수 있었다.

창업 20년 만에 처음 종로구를 떠났다. 지하철 3호선 신사역 근처, 구내식당과 강당까지 갖춰진 번듯한 건물이었다. 강남구 신사동과 압구정동은 당시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였기에 우리 직원들도 새로운 환경을 매우 반겼다.

조사회사는 야근과 철야, 휴일 근무가 많은 편이다. 종일 많은 수의 조사원들이 자주 드나든다. 그러한 조건에서 대기업인 두원그룹 본사 건물 중간층에 더부살이하기는 쉽지 않았다. 보안을 위해 한밤의 일정 시간대에는 출입이 금지되기도 했다. 몇 분 차이로 회사를 빠져나가지 못해 문이 열릴 때까지 새벽까지 기다리는 일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신사동에선 좋은 일이 많았다. 1995년에는 갤럽 인터내셔널 서울 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했고, 제1회 지방 선거 결과 예측도 적중했다. 1996년에는 다섯 조사회사가 함께 참여한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예측 조사에서는 가장 높은 적중률을 기록해 기존 클라이언트들의 신뢰를 더했다.

1996년 말에 이르러서는 TV시청률 사업에서 입은 막대한 투자 손실을 거의 만회할 수 있을 정도로 회사 매출이 크게 늘었다. 그때 입사한 직원들 중에는 10년 이상 근속자가 유난히 많았고, 일부는 지금도 회사에 남아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두원그룹이 계열사를 본사 건물로 불러들이기로 결정해 우리는 2년 만에 다시 짐을 쌌다.

1996년 11월 마지막 날, 한국갤럽은 다시 사직동으로 돌아왔다. 과거에 있었던 221번지 고려빌딩에서 사직터널 쪽으로 약 30미터쯤 올라간 위치 208번지 ‘뉴퍼시픽 빌딩’의 1층부터 6층까지를 임대했다. 맨 꼭대기 7층에는 다른 회사가 입주해 있었다. 새 건물이긴 했지만 날림으로 지었는지 아예 온수 배관이 없었고, 보일러는 한파(寒波) 때마다 고장이 났다. 어느 겨울엔 사무실 안 생수통까지 얼어 터지는 바람에 전 직원이 조기 퇴근한 적도 있다.

설상가상으로 건물주에게 직접 고용된 관리인은 세입자인 우리에게 마치 건물주인 양 권력을 행사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일종의 ‘갑질’이랄 수 있겠다. 그는 우리 회사 청소도 맡았는데 설렁설렁하기 일쑤라 우리 직원들과 자주 마찰이 있었고, 어느 때는 기르는 개를 데리고 사무 공간에 등장해 놀라움을 주기도 했다. 다음에는 반드시 세입자 신세를 벗어나리라, 좋은 곳에 땅을 마련해서 멋진 건물을 짓겠다고 다짐했다.

신사동에서부터 상승세를 그린 사운(社運)은 정점(頂點)에 도달한 듯, 1997년 12월 18일 한국갤럽의 제15대 대통령 선거 예측은 국내외 화제가 되며 명성을 드높였다. 하지만 경영자 입장에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2주 전인 12월 3일 우리 정부의 IMF 구제금융 신청 사태가 한국 사회 전체를 초유의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민간기업들은 불황이 닥치면 마케팅 비용을 줄인다. 조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그런 때일수록 조사를 늘려 위기를 타개할 기회를 발견해야 한다고 오랫동안 역설해왔지만 기업들 내부 사정은 달랐다. 마케팅 조직이나 조사 담당 부서는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쓰는 곳으로 분류되어 해체되거나 축소됐다. 우리 클라이언트 중에서도 적잖은 수가 다른 부서로 이동하거나 회사를 떠났다.

1998년 초, 나는 장기 불황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처음으로 전 직원 승진 보류와 연봉 인상 동결을 결정했다. TV시청률 사업을 접으며 직원들을 떠나보낸 악몽의 순간을 또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일부 대기업들의 프로젝트는 줄었다. 그러나 당시 인터넷과 이동통신 사업을 필두로 일어난 벤처 붐은 우리의 새로운 시장이 됐다. 1997년 대선 적중의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한국갤럽을 찾는 회사들은 꾸준히 늘어 이듬해 바로 경영 정상화를 할 수 있었다.

승진, 연봉 동결 조치는 결과적으로 직원들의 불안감을 부추기고 사기만 꺾은 듯해 마음에 걸렸다. 이를 보상하는 의미에서 2000년에는 업계 최고 수준으로 연봉을 인상했다. 이후로는 아무리 경제 전망이 나빠도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선제적 조치를 취하기보다는 ‘긍정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에게 미래는 언제나 호의적’이란 믿음으로 다 함께 힘내자고 말한다.

한국갤럽은 그렇게 IMF를 잘 버텨냈지만 우리가 세든 건물주는 부도를 냈다. 건물이 법원 경매에 부쳐졌다. 다른 사람에게 낙찰될 경우 또 쫓겨날 수도 있었다. 건물 상태가 워낙 부실해 처음엔 썩 내키지 않았지만 인왕산, 북한산, 북악산의 사계절 풍경을 마주해 즐길 수 있는 위치는 무척 매력적이었다. 고심 끝에 결국 나는 건물을 구입했다. 약 3년간의 보수공사 끝에 지금의 외관을 갖추었다. 건물명은 ‘뉴퍼시픽 빌딩’에서 ‘한국갤럽 빌딩’으로 바뀌었다.

그사이 올망졸망한 골목에 오래된 단독주택들이 밀집했던 내수동 일대가 먼저 재개발되어 ‘경희궁의 아침’이란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곧이어 우리 건물 바로 옆에선 ‘스페이스본’ 아파트 공사가 시작됐다. 수년간 이어진 건설현장 소음과 분진에 다들 고생이 많았다.

1981년부터 1994년까지, 그리고 1996년 말부터 지금까지 내가 이곳 사직동에서 보낸 세월만 30년이 훌쩍 넘는다. 오래전 사직동의 정취가 그리울 때면 그림책 작가 한성옥의 〈나의 사직동〉이라는 책을 꺼내본다. ‘사직동 129번지’에서 자랐다는 그는 사라지기 전 이웃의 모습을 사진과 그림으로 기록했다.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여 출판사를 통해 연락을 했는데 그는 흔쾌히 우리 회사를 방문해주었다. 책에 등장하는 일부 장면이 유난히 익숙하다 싶었는데, 한 작가가 우리 건물 계단에서 사진을 찍었다고 하여 더욱 반가웠다. 그날 함께 밥을 먹으며 사직동의 옛 모습과 동네를 떠난 주민들의 근황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