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발행 단행본 〈조사인으로 살다: 박무익 회고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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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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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갤럽 박사를 직접 만나고, 사명을 한국갤럽으로 바꾸면서 나는 여론조사를 통해 좀 더 공익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꼈다. 1979년 당시 우리나라는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3선 끝에 민선(民選)을 폐지하고 구축한 장기 집권의 길, 이른바 유신 체제에 있었다. 유신 말기의 상황은 지도자가 국민의 소망이나 갈망을 너무도 모르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하면 대통령과 정치인들에게 민심을 전달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갈할 방법은 없을까? 고심 끝에 갤럽 인터내셔널의 사무총장 노만 웹 박사와 일본 회원사인 NRC의 니키 고우지 사장을 한국에 초청해 ‘민주주의와 여론조사’라는 제목의 국제학술회의를 기획했다.
그해 11월 3일 한국갤럽-중앙일보-동양방송 공동 개최, 장소는 서울 세종문화회관 회의실로 잡았다. 웹 박사와 니키 사장은 10월 25일 서울에 도착했다. 그런데 다음 날 저녁부터 사태가 심상치 않더니 27일 아침 박정희 대통령 서거(逝去) 소식이 들려왔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학술회의 참석을 위해 한국에 온 두 사람은 낯선 땅에서 맞은 정변에 아연실색했다. 국제학술회의는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들을 안심시키려 적당히 쉴 곳을 찾았지만 계엄령하에 서울의 웬만한 음식점들은 문을 닫아버려 난감했다. 할 수 없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경주 관광단지로 그들을 안내했다. 경주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한국의 현대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일제 통치에서 1945년 8월 독립, 1948년 남한 정부 수립과 초대 대통령 이승만 취임, 1950년 한국전쟁 발발, 1953년 휴전, 장기 집권 시도와 부정 관권선거에 항거한 1960년 4.19 혁명,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과 유신 체제.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장기간 독재자로 군림했던 그가 아끼던 부하의 총탄에 운명.
웹 박사와 니키 사장은 ‘한국은 참 드라마틱한 나라’라고 말했다. 웹 박사는 ‘머지않아 민주주의 시대가 오게 될 것이고 자네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며 격려해주었다. 국제학술회의가 무산된 탓에 나는 웹 박사가 준비한 ‘세계 여론조사 현황과 효용’이라는 발표 원고를 중앙일보에 제공했다. 중앙일보는 한 달 넘게 지난 12월 5일에 다음과 같이 간추려 보도했다.
세계 여론조사업계 대가(大家)의 통찰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여론조사가 지켜야 할 원칙을 담고 있다. 중앙일보 보도 바로 다음 날인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선거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사회는 여전히 어둡고 무거웠다. 긴급조치 제9호가 머지않아 해제될 것이란 얘기가 오갔다. 하지만 통금 시간을 밤 10시로 앞당긴 계엄령은 그대로 지속 중이었다.
과도 정부를 운영해야 했던 제10대 대통령 재임 기간은 8개월 남짓이었다. 법적으로 제10대 대통령은 최규하였지만, 권력에는 공백이 있었다. 보안사령관 전두환 중장은 국가 위기를 명분으로 권력의 공백을 자신과 군인들로 채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군인끼리 서울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하극상을 일으킨 사건이 발생했다. 1979년 12월 12일, 이날 이후 권력의 사실상 주인이 신군부 세력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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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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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갤럽 박사를 직접 만나고, 사명을 한국갤럽으로 바꾸면서 나는 여론조사를 통해 좀 더 공익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꼈다. 1979년 당시 우리나라는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3선 끝에 민선(民選)을 폐지하고 구축한 장기 집권의 길, 이른바 유신 체제에 있었다. 유신 말기의 상황은 지도자가 국민의 소망이나 갈망을 너무도 모르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하면 대통령과 정치인들에게 민심을 전달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갈할 방법은 없을까? 고심 끝에 갤럽 인터내셔널의 사무총장 노만 웹 박사와 일본 회원사인 NRC의 니키 고우지 사장을 한국에 초청해 ‘민주주의와 여론조사’라는 제목의 국제학술회의를 기획했다.
그해 11월 3일 한국갤럽-중앙일보-동양방송 공동 개최, 장소는 서울 세종문화회관 회의실로 잡았다. 웹 박사와 니키 사장은 10월 25일 서울에 도착했다. 그런데 다음 날 저녁부터 사태가 심상치 않더니 27일 아침 박정희 대통령 서거(逝去) 소식이 들려왔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학술회의 참석을 위해 한국에 온 두 사람은 낯선 땅에서 맞은 정변에 아연실색했다. 국제학술회의는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들을 안심시키려 적당히 쉴 곳을 찾았지만 계엄령하에 서울의 웬만한 음식점들은 문을 닫아버려 난감했다. 할 수 없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경주 관광단지로 그들을 안내했다. 경주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한국의 현대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일제 통치에서 1945년 8월 독립, 1948년 남한 정부 수립과 초대 대통령 이승만 취임, 1950년 한국전쟁 발발, 1953년 휴전, 장기 집권 시도와 부정 관권선거에 항거한 1960년 4.19 혁명,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과 유신 체제.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장기간 독재자로 군림했던 그가 아끼던 부하의 총탄에 운명.
웹 박사와 니키 사장은 ‘한국은 참 드라마틱한 나라’라고 말했다. 웹 박사는 ‘머지않아 민주주의 시대가 오게 될 것이고 자네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며 격려해주었다. 국제학술회의가 무산된 탓에 나는 웹 박사가 준비한 ‘세계 여론조사 현황과 효용’이라는 발표 원고를 중앙일보에 제공했다. 중앙일보는 한 달 넘게 지난 12월 5일에 다음과 같이 간추려 보도했다.
| 여론조사는 민주 발전의 촉진제 - 갤럽 여론조사 웹 사무총장이 말하는 그 효용성 현재 세계 각국의 여론조사는 시장조사를 수행하는 민간회사나 연구기관이 행하는 게 보편적인 현상인데 정치적 특성의 측면에서 구분해 볼 때 아주 흥미 있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공산국가는 여론조사를 반체제 활동의 하나로 취급, 투표자의 의견도 소비자의 의견도 없다는 식이고 국민의 의견은 오직 ‘마르크시즘’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다. 둘째, 10여 년 전의 칠레와 스페인 같은 좌경 독재국가는 정치여론조사를 위험시해 조사를 못 하게 하거나, 하더라도 발표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장경제는 존재하고 있어 달갑지 않게 여기지만 국민의 의사는 실제 존재하고 있다. 셋째, 유럽, 북미 등의 자유개방사회는 의회정치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여론조사의 중요성을 인정하며, 그 영향력도 크다. 여론조사의 사회적 역할은 민주사회의 전개 과정에서 긍정적이고 아주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영국의 경우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은 정부가 수권 기간인 5년 동안 독재를 할 수 있다고 흔히 이야기하지만 정부나 의원들이 여론조사 발표를 의식, 매월 발표되는 조사 결과를 참고해 정책을 전개함으로써 국민의 여망에 부응한다. 이 때문에 저널리즘도 여론조사 결과에 반대되는 기사, 예컨대 실제로는 민심에 반하고 있는 정부의 지지도가 상승한다는 식으로 왜곡하지 못하게 된다. 현대 민주사회에서 정부가 여론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필요한 절차다. 선거 때 발표되는 여론조사 결과는 투표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만약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민주주의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이 밖에 여론조사는 외교, 사회 정책 분야 등에도 크게 공헌하고 있다. 바람직한 여론조사기관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우선 신문, 방송, 정당, 정부 등의 기관과 독립적 입장에 서야 하며, 독자적인 조사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기업, 시장조사 등을 겸업해야 한다. 둘째, 표본 추출이 공정해야 하며, 응답자의 보호, 조사 의뢰 책임 등의 조사 윤리를 준수해야 한다. 셋째, 조사 결과를 발표할 때는 전체를 발표해야 하며 조사기관은 발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독자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조작을 해서는 안 되며 기본 자료는 관련 연구기관에 공개할 수 있어야 한다. 여론조사는 민주사회 발전에 바탕이 되는 기본 절차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여러 방면으로부터의 압력이나 고통을 받을 수도 있지만 여론조사야말로 흥미 있는 일 중 하나다. |
세계 여론조사업계 대가(大家)의 통찰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여론조사가 지켜야 할 원칙을 담고 있다. 중앙일보 보도 바로 다음 날인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선거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사회는 여전히 어둡고 무거웠다. 긴급조치 제9호가 머지않아 해제될 것이란 얘기가 오갔다. 하지만 통금 시간을 밤 10시로 앞당긴 계엄령은 그대로 지속 중이었다.
과도 정부를 운영해야 했던 제10대 대통령 재임 기간은 8개월 남짓이었다. 법적으로 제10대 대통령은 최규하였지만, 권력에는 공백이 있었다. 보안사령관 전두환 중장은 국가 위기를 명분으로 권력의 공백을 자신과 군인들로 채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군인끼리 서울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하극상을 일으킨 사건이 발생했다. 1979년 12월 12일, 이날 이후 권력의 사실상 주인이 신군부 세력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