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발행 단행본 〈조사인으로 살다: 박무익 회고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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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갤럽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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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창업 4년 차. 직원은 나를 포함해 다섯 명으로 늘었지만, 여전히 회사를 키우기는커녕 망하지 않는 데 전력을 다하는 형편이었다. 매월 월급날이 다가올 때마다 초조해졌다. 당일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돈을 구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월급 미션’을 무사히 완수하고 한숨 돌릴 때나 직원들에게 내색할 수 없는 고민이 있을 때면 혼자 건물 1층 오락실에 가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당시 34세, 충분히 다른 일에 새로 도전할 수 있는 나이였다. 당장 돈이 안 된다는 이유만으로 일을 접기에는 이른 나이이기도 했다. 그해 큰딸 소윤이 국민학교에 입학해 나는 학부형이 되었다. 아내는 나의 양어머니를 모시고 한 해 열 번 넘는 제사를 지냈다. 제사 후엔 며칠씩 앓으면서도 나를 탓하지 않았고 한편으론 독서와 신앙(천주교), 봉사 활동을 계속했다. 나약한 생각이 스멀거릴 때마다 한결같은 아내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의 권유로 조지 갤럽(George Gallup) 박사의 책 〈The Sophisticated Poll Watcher’s Guide〉를 읽게 됐다. 여론조사 전문가로서의 체험을 쉽고 간결하게, 담담하게 기록한 책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길이 봉쇄된 유신 체제하에 있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갈증이 심하던 상황에서 갤럽 박사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조사인(pollster)이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불빛처럼 느껴졌다. 특히 민주주의를 위한 여론조사의 역할과 기능을 설명한 부분에서 내 가슴은 세차게 뛰었다.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한번 부딪혀보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얼마 후 나는 저자인 갤럽 박사에게 그의 책 한국어판 번역을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돌아온 답장은 조금 기이했다. 저작권료에 대한 요구도 없었고 번역되면 한국어판을 몇 권 받고 싶다는 이야기뿐이었다. 저작권료를 받지 않을 테니 번역해도 좋다는 승낙이었다. 나는 그가 조사의 대가(大家)라서 돈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약 1년여 노력 끝에 나는 1978년 〈갤럽의 여론조사〉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을 냈다. 나보다 더 번역에 능한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조사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꿔준 그 책의 문장 한 줄, 단어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 회사 일 틈틈이 직접 매달렸다. 책이 나온 즉시 열 권을 포장해 갤럽 박사에게 보냈다.
얼마 뒤 도착한 갤럽 박사의 답장에는 ‘갤럽 인터내셔널(Gallup International)이란 조직이 있는데 입회원서를 내고 이 회의에 참가해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편지를 읽는 순간 나는 ‘이제 조사를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됐다’는 기쁨과 함께 ‘나도 조사전문가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한껏 설렜다.
편지로만 알던 조지 갤럽 박사를 직접 대면한 것은 1979년 3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갤럽 인터내셔널 국제회의에서다. 그는 큰 키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동안(童顔)의 노인이었다. 악수를 할 때 그의 손이 아주 컸다는 점, 인사하느라 고개를 숙였을 때 본 그의 커다란 구두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갤럽 박사에게 우리나라 신라시대 모조금관(模造金冠)을 선물하면서 ‘당신의 이름이 사전에 여론조사의 대명사처럼 기록된 것과 같이 조사업계의 왕에게 어울리는 선물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와 같이 즐거운 표정으로 반겨주었다.
첫 만남이었지만 우리의 대화는 조사를 주제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는 갤럽 인터내셔널의 대규모 국제 조사에서 얻은 경험에서 ‘나라마다 말과 관습이 다르므로 조사인은 그 나라 사람에게 적합한 질문 방법과 척도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미국인의 70%가 무기 자유판매에 반대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을 때 무기업자들이 동원한 갱들의 갖은 협박을 견뎌야 했던 일과 같은 경험담도 들려주었다. 여러 이야기 중에서도 ‘조사인은 정직해야 함과 동시에 용기도 필요하다’는 갤럽 박사의 말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무익, 한국에서도 정치여론조사가 가능한 풍토인가?”
대화 도중 갤럽 박사가 던진 한 질문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학창 시절 직접 가담했던 시위 현장, 구속된 동문들 얼굴, 무시로 들리는 독재 횡포, 그리고 얼마 전 청와대가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가려진 내 작은 사무실 창문이 떠올랐다.
“아, 정치여론조사 말이죠. 점진적으로, 앞으로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고요.”
잠시 말을 더듬으며 간신히 답했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지구상에 지금 한국과 같은 나라는 아주 많다네. 무익, 자네는 큰 짐을 지게 된 거야.”
회의는 시드니에서 2일간, 멜버른에서 5일간 예정돼 있었다. 시드니에서 멜버른으로 가야 하는데 항공사 정비공들의 파업으로 비행기가 뜨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야간열차를 타고 멜버른으로 이동했다. 유신 체제를 살다 그곳에 간 나는 정비공들의 파업으로 공공성이 강한 항공기 운항이 중지된 것에 놀랐다. 별 불평 없이 교통편을 기차로 바꾸는 사람들의 무덤덤함도 묘하게 보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노동자의 파업을 잘 볼 수 없는 사회였다.
멜버른에서 속개된 회의 마지막 날 아침, 갤럽 인터내셔널 사무총장 노만 웹(Norman Webb)이 나에게 다가와 잠시 밖에 나가 있으라고 했다. 나를 정식 회원으로 받아들일지에 대한 선거 때문이었다. 회의장 밖으로 나온 나는 줄담배를 피우며 서성거렸다. 온갖 상념이 교차했다. 담뱃갑이 비어갈 즈음,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회의장에 들어서는 순간 안에 있던 사람들이 “Congratulations!” 하면서 박수로 맞아주었다. 내가 갤럽 회원이 된 것이다. 일본 회원 니키 고우지(二木宏二) 씨가 기뻐하는 내게 다가왔다. 갤럽 박사가 적극 추천했기 때문에 만장일치로 통과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갤럽 박사가 격려의 말을 건넸다.
“축하하네. 자네는 이제 큰 짐을 맡았어. 특히 한국의 민주주의를 꽃피워야 하는 큰 짐 말이야. 행운이 있기를 비네.”
그날 이후 어려운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갤럽 박사의 말은 등대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그와의 만남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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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갤럽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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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창업 4년 차. 직원은 나를 포함해 다섯 명으로 늘었지만, 여전히 회사를 키우기는커녕 망하지 않는 데 전력을 다하는 형편이었다. 매월 월급날이 다가올 때마다 초조해졌다. 당일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돈을 구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월급 미션’을 무사히 완수하고 한숨 돌릴 때나 직원들에게 내색할 수 없는 고민이 있을 때면 혼자 건물 1층 오락실에 가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당시 34세, 충분히 다른 일에 새로 도전할 수 있는 나이였다. 당장 돈이 안 된다는 이유만으로 일을 접기에는 이른 나이이기도 했다. 그해 큰딸 소윤이 국민학교에 입학해 나는 학부형이 되었다. 아내는 나의 양어머니를 모시고 한 해 열 번 넘는 제사를 지냈다. 제사 후엔 며칠씩 앓으면서도 나를 탓하지 않았고 한편으론 독서와 신앙(천주교), 봉사 활동을 계속했다. 나약한 생각이 스멀거릴 때마다 한결같은 아내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의 권유로 조지 갤럽(George Gallup) 박사의 책 〈The Sophisticated Poll Watcher’s Guide〉를 읽게 됐다. 여론조사 전문가로서의 체험을 쉽고 간결하게, 담담하게 기록한 책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길이 봉쇄된 유신 체제하에 있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갈증이 심하던 상황에서 갤럽 박사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조사인(pollster)이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불빛처럼 느껴졌다. 특히 민주주의를 위한 여론조사의 역할과 기능을 설명한 부분에서 내 가슴은 세차게 뛰었다.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한번 부딪혀보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얼마 후 나는 저자인 갤럽 박사에게 그의 책 한국어판 번역을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돌아온 답장은 조금 기이했다. 저작권료에 대한 요구도 없었고 번역되면 한국어판을 몇 권 받고 싶다는 이야기뿐이었다. 저작권료를 받지 않을 테니 번역해도 좋다는 승낙이었다. 나는 그가 조사의 대가(大家)라서 돈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약 1년여 노력 끝에 나는 1978년 〈갤럽의 여론조사〉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을 냈다. 나보다 더 번역에 능한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조사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꿔준 그 책의 문장 한 줄, 단어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 회사 일 틈틈이 직접 매달렸다. 책이 나온 즉시 열 권을 포장해 갤럽 박사에게 보냈다.
얼마 뒤 도착한 갤럽 박사의 답장에는 ‘갤럽 인터내셔널(Gallup International)이란 조직이 있는데 입회원서를 내고 이 회의에 참가해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편지를 읽는 순간 나는 ‘이제 조사를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됐다’는 기쁨과 함께 ‘나도 조사전문가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한껏 설렜다.
편지로만 알던 조지 갤럽 박사를 직접 대면한 것은 1979년 3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갤럽 인터내셔널 국제회의에서다. 그는 큰 키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동안(童顔)의 노인이었다. 악수를 할 때 그의 손이 아주 컸다는 점, 인사하느라 고개를 숙였을 때 본 그의 커다란 구두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갤럽 박사에게 우리나라 신라시대 모조금관(模造金冠)을 선물하면서 ‘당신의 이름이 사전에 여론조사의 대명사처럼 기록된 것과 같이 조사업계의 왕에게 어울리는 선물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와 같이 즐거운 표정으로 반겨주었다.
첫 만남이었지만 우리의 대화는 조사를 주제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는 갤럽 인터내셔널의 대규모 국제 조사에서 얻은 경험에서 ‘나라마다 말과 관습이 다르므로 조사인은 그 나라 사람에게 적합한 질문 방법과 척도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미국인의 70%가 무기 자유판매에 반대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을 때 무기업자들이 동원한 갱들의 갖은 협박을 견뎌야 했던 일과 같은 경험담도 들려주었다. 여러 이야기 중에서도 ‘조사인은 정직해야 함과 동시에 용기도 필요하다’는 갤럽 박사의 말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무익, 한국에서도 정치여론조사가 가능한 풍토인가?”
대화 도중 갤럽 박사가 던진 한 질문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학창 시절 직접 가담했던 시위 현장, 구속된 동문들 얼굴, 무시로 들리는 독재 횡포, 그리고 얼마 전 청와대가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가려진 내 작은 사무실 창문이 떠올랐다.
“아, 정치여론조사 말이죠. 점진적으로, 앞으로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고요.”
잠시 말을 더듬으며 간신히 답했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지구상에 지금 한국과 같은 나라는 아주 많다네. 무익, 자네는 큰 짐을 지게 된 거야.”
회의는 시드니에서 2일간, 멜버른에서 5일간 예정돼 있었다. 시드니에서 멜버른으로 가야 하는데 항공사 정비공들의 파업으로 비행기가 뜨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야간열차를 타고 멜버른으로 이동했다. 유신 체제를 살다 그곳에 간 나는 정비공들의 파업으로 공공성이 강한 항공기 운항이 중지된 것에 놀랐다. 별 불평 없이 교통편을 기차로 바꾸는 사람들의 무덤덤함도 묘하게 보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노동자의 파업을 잘 볼 수 없는 사회였다.
멜버른에서 속개된 회의 마지막 날 아침, 갤럽 인터내셔널 사무총장 노만 웹(Norman Webb)이 나에게 다가와 잠시 밖에 나가 있으라고 했다. 나를 정식 회원으로 받아들일지에 대한 선거 때문이었다. 회의장 밖으로 나온 나는 줄담배를 피우며 서성거렸다. 온갖 상념이 교차했다. 담뱃갑이 비어갈 즈음,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회의장에 들어서는 순간 안에 있던 사람들이 “Congratulations!” 하면서 박수로 맞아주었다. 내가 갤럽 회원이 된 것이다. 일본 회원 니키 고우지(二木宏二) 씨가 기뻐하는 내게 다가왔다. 갤럽 박사가 적극 추천했기 때문에 만장일치로 통과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갤럽 박사가 격려의 말을 건넸다.
“축하하네. 자네는 이제 큰 짐을 맡았어. 특히 한국의 민주주의를 꽃피워야 하는 큰 짐 말이야. 행운이 있기를 비네.”
그날 이후 어려운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갤럽 박사의 말은 등대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그와의 만남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