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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인으로 살다〉 창업 전선(創業 戰線) #ep.04
2024/05/07
● 2017년 발행 단행본 〈조사인으로 살다: 박무익 회고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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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전선(創業 戰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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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6월 17일, 나는 조사회사 KSP(Korea Survey Polls)를 열었다. 지금도 남아있는 서울 종로2가 경영빌딩 8층 803호, 1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다. 3주 전쯤 막내딸 지윤을 출산한 아내는 개업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 나에게 ‘사장님 된 걸 축하한다, 힘내서 번창하길 바란다’는 말을 건네는 아내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주위에선 내가 성공가도를 달린다고 했지만, 제일기획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부터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일이 있었다. 경영학과 대학원 수업 중 책에서만 봤던 마케팅조사, 외국에선 이미 많이 활용하고 있지만 국내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였다. 내가 하고 있는 광고가 제대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지 효과를 측정하는 수단이란 점에서 큰 매력을 느꼈다. 광고와 마케팅조사를 잘 결합하면 괜찮은 사업이 될 것 같았다.

아내는 물론 직장 동료, 선후배, 친구들까지 모두 만류했지만 나는 결국 사표를 냈다. 가진 돈을 몽땅 털어 사무실을 얻고 개업했다. 나는 사장이면서 유일한 연구원이며 자금조달원이었다. 1974년 당시 조사는 일종의 벤처(venture)였고, 나는 실적 전무한 31세의 청년 창업자였다.

회사 운영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대기업조차 조사가 무엇이고 어디에 활용하는 것인지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고객이 스스로 찾아올 리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만큼 새로운 분야가 아니었다면 창업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나 조사에 대해 설명했다. 매번 반응은 비슷했다. “글쎄, 우리 제품은 지금도 잘 팔리는데 굳이 돈 들여서 조사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창업 소식을 듣고 인사차 사무실에 들른 친구들은 나에게 잡혀 의무적으로 조사 강의를 들은 후에야 바둑 한판이라도 둘 수 있었다. 일 없이 보내는 날이 길어졌다. 돈이 바닥나면서부터는 수시로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다. 어쩌다 카피 작성이나 광고 강의를 해서 돈이 생기면 외국의 조사 전문 서적을 구해 읽었다. 성북구 정릉 골짜기 단칸방에서 올망졸망한 아이 셋을 키우며 생활에 쪼들리는 아내에겐 미안했지만, 하루라도 빨리 개점휴업 상태를 면하는 것만이 우리 가족 살 길이었다.

조사회사 간판은 내걸었지만, 실무 경험은 거의 없었기에 조사를 잘 안다는 학계 사람들을 수소문해 배우고 공부했다. 특히 그때 만난 한국행동과학연구소 연구원 이만영(前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은 질문지 작성, 표본설계, SPSS 통계 분석 전반에 걸쳐 나의 스승이 되어주었고, 이후 40년 넘게 격 없는 친구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제1호 프로젝트는 창업 3개월 후인 9월, 금성사가 의뢰한 〈세탁기 광고 효과 측정 조사〉다. 내가 금성사에 있을 때 럭키화학 전산실에 근무했던 대학 선배 김양일(前 인간능력개발원장)이 금성사 판촉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가 창업한 후배를 염려해서인지, ‘이제 금성사도 과학적인 마케팅 관리를 해야 한다, 그 첫 단계로 시장조사를 해라’는 나의 주장이 힘을 발한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후자라고 믿는다. 제1호 프로젝트를 끝내자마자 〈가정전기제품에 대한 소비자 행동 조사〉를 맡았으니 말이다.

첫 조사는 이만영 등 주위 지인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끝냈지만, 계속 그런 식으로 일할 수는 없었다. 질문지를 작성하고 수집된 자료를 분석하는 일은 당시 나보다 이만영이 더 뛰어났다. 전문적인 조사회사라면 연구실 안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상황까지 고려해야만 비로소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번째 조사를 앞두고 가장 신경 쓴 점은 조사원1) 교육이다. 응답자를 직접 만나 인터뷰하는 조사원의 인식과 태도야말로 정확한 조사의 시작이란 생각에서다.

두 번째 조사에는 이화여대 사회학과 3학년 학생들이 조사원으로 나서게 됐다. 회사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대학, 이화여대를 찾아가 교수를 설득했다. 향후 사회학 연구에는 여론조사를 활용하는 일이 더 많아질 것이며, 직접 현장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다행히 교수는 물론 학생들도 큰 관심을 보였다. 1974년 10월, 나는 이화여대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조사원 교육을 했다. 일부 내용을 아래 옮긴다.

‘조사의 생명은 정확성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조사통계 수준은 높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농산물 통계가 잘못되어 소, 돼지, 고추 파동을 겪은 일을 여러분도 기억할 겁니다. 엉터리 조사, 엉터리 통계가 빚어낸 엄청난 낭비요, 농민들이 당해야 하는 아픔입니다. 조사의 주체가 누구이든 조사전문기관은 정확한 조사통계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틀린 조사, 믿을 수 없는 조사는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고, 그것은 우리 사회에 대한 커다란 죄악입니다. 기업은 여러분이 면접한 결과를 바탕으로 제품을 개발하고 폐기합니다. 만일 조사가 엉터리여서 수십억의 돈을 들여 제품을 만들었다가 안 팔린다면 기업은 망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사회여론조사의 결과가 엉터리라면 우리나라의 중요한 정책의 방향이 틀어지고, 세금이 낭비되며, 무엇보다도 언제까지나 ‘못난 민족’이라고 경멸받게 될 겁니다.

‘조사할 때는 평소의 자기를 잠시 잊어야 합니다. 조사는 피곤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가구를 방문했을 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장면에 부딪히게 될 겁니다. 대문을 열어주지 않는 집, 기분 나쁜 장면, 무식한 사람들, 어떤 때는 개에게 물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오리엔테이션 받은 대로 하나하나의 질문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즉, 자존심은 접어두고 오로지 조사에 집중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조사는 자기의 인생을 올바로 보게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은 100명 중 5명에 불과합니다. 즉, 면접원 여러분은 그 과정이 어떻든 간에 선택받은 엘리트입니다. 생활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엘리트로 대접받기를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면접원으로 일하게 되면 여러분이 살아온 상황과 전혀 별개의 세계–때론 가난하고, 무식하고, 촌스러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면서 이해하려 하고, 호의적으로 보이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들의 생각이 여러분의 생각과는 어떻게 다르며, 그들은 어떻게 숨 쉬고 살아가는지를 관념상이 아니라 피부로 접하게 될 것입니다.

면접원으로 일한다는 것은 직접 해보지 않으면 모를, 혹은 그냥 지나쳐 버렸을 일들과 접할 기회입니다. 책 속에서 배운 세계와 전혀 다른 삶을 체험하며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재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아르바이트로 해본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벗어나 이러한 큰 뜻에 주목해 보기를 바랍니다.


여론조사가 지니는 의미와 조사원 역할의 중요성을 역설하다 보니 내 말투는 점점 연설조가 되어갔다. 듣는 학생들의 태도 역시 매우 진지했고, 그들의 표정에선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이날 나는 면접조사 절차와 주의 사항들을 상세히 설명한 후, 매우 감상적인 말로 마무리했다.

이제 여러분은 통계, 여론조사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가에 대해 개념을 막연하게나마 알 것 같은 느낌이 올 겁니다. 그러나 ‘정확한 조사’는 ‘알 것 같은 느낌’만으로는 안 됩니다. 한 개 한 개의 질문은 여러분의 땀을 요구합니다.

조사는 성실함과 예술성이 뒤섞인 일입니다. 덥고, 춥고,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날에도, 때로는 아픈 날에도 질문지를 들고 낯선 집의 대문을 두드리는 여러분 머리 위의 하늘이 너무 높고 푸르다고 생각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돈이 아니라 땀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인가?”라고 반문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공부하는 조사방법론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을 배우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조사 실무를 통해 결코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내용을 체득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이 맡은 임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건투를 빕니다.


제1호 조사 기록은 분실했지만, 제2호 조사 보고서는 지금도 남아 있다. 뒤가 비칠 정도로 얇은 종이에 먹지를 대고 한 글자 한 글자 타자를 쳤다. 그래프는 자를 대고 볼펜으로 그린 다음 숫자를 직접 써넣었다.

조사원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1974년 10월 20일부터 30일까지 서울시 11개구 총 317개 동 중에서 무작위 추출된 19개 동의 502가구를 직접 방문, 해당 가구의 주부를 인터뷰했다. 조사 내용은 회사 인지도와 이미지, 주요 가전제품 사용률, 선호도, 구매 행태, 사용 만족도, 광고에 대한 것이었다. 이 조사는 훗날 규모를 키워 1998년까지 매년 진행한 〈LG전자 주요 전자제품 정기지표 조사〉의 효시가 됐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열정적으로 조사원 임무를 다했다. 일이 끝난 후에는 매우 보람 있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이화여대 사회학과 학생들은 한동안 서울 지역 조사를 전담했다. 나중에는 교육심리학과 학생들도 가세했다. 전국 조사를 할 때는 각 지방 거점 대학을 방문해 학생들에게 조사원 교육을 했다.

이후 조사 물량이 꾸준히 늘면서 회사 내에 조사원 관리와 질문지 배부, 회수 등 실사 전담 인력을 두어 정규 조직화했다. 조사원 일은 학생들 사이에서 꽤 괜찮은 아르바이트로 알려졌다. 일하고 싶다고 자원하는 사람이 늘어 조사원 등록제를 도입했다. 출장이 잦은 지방 대도시부터 해당 지역 실사 책임자가 상주할 사무실을 마련했고, 1979년 말 무렵에는 전국 6개 도시 실사 네트워크를 갖추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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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창기 조사는 대부분 면접(face-to-face) 방식이었기 때문에 인터뷰하는 사람을 통상 ‘면접원’이라고 불렀지만, 이후 전화 등 비대면 조사가 등장하면서부터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조사원’이라는 명칭 쓰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