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발행 단행본 〈조사인으로 살다: 박무익 회고록〉에서 발췌
광고는 예술인가, 과학인가
1987년 대선 예측, 1988년부터 정치지표 조사를 하면서부터 한국갤럽은 세간에 정치조사를 주로 하는 회사로 알려졌다. 그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지만, 실제로 한국갤럽의 전체 매출에서 정치 분야 조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크지 않다. 그나마도 큰 선거가 있는 시기에만 집중될 뿐이다. 회사 설립 초기부터 일반 기업체가 의뢰하는 마케팅조사가 대부분이었기에 나 역시 그 분야의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거나 개발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전직(前職) 카피라이터로서 한동안 몸담았던 광고업계 관련 조사에 관심이 많았다.
조사업계로 옮긴 후 첫 조사 프로젝트는 세탁기 광고에 대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가정전기제품에 대한 소비자 행동조사〉였다. 이후 금성사(現 LG전자)와는 20년 넘게, 럭키화학(現 LG생활건강)과는 15년간 주요 제품 마케팅지표와 광고 효과 측정 조사를 독점 수행했다.
럭키화학과는 연 4회씩 10년 동안 샴푸, 비누 등 제품군별 광고 효과 조사를 했다. 엄청난 광고비를 쓰면서도 그 효과 측정은 제대로 하지 않는 기업들이 여전히 많다. 그런 점에서 럭키화학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1970년대에 이미 조사 결과에 근거한 과학적 광고 관리를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때의 조사는 ‘현재 나가고 있는 광고가 경쟁사와 비교해 얼마나 효과가 있는가?’, ‘효과가 없다면 왜 없는가?’를 밝히는 일이었다. ‘앞으로의 광고 방향과 콘셉트(concept)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제안하는 일종의 컨설팅 역할도 겸했다. 초창기에는 럭키화학의 마케팅 책임 임원인 최영재 부사장이, 그 후임으로는 조명재 전무가 조사 결과 보고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광고주와 광고대행사 담당자가 동석한 자리에서 집행된 광고의 효과 여부를 놓고 뜨거운 설전과 공방이 오가던 분위기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광고 효과 조사 프로젝트 진행 시에는 괴로울 때가 많았다. 광고주와 광고대행사 간의 입장 차뿐만 아니라 광고주 기업 내부의 영업 부문과 홍보·마케팅 부문 간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씁쓸한 기억으로 남이 있는 일화도 있다. 지금은 생산되지 않는 추억의 술, 1977년 진로 ‘길벗 위스키’와 백화양조 ‘베리나인 위스키’의 대결이다. 가히 전쟁(戰爭)이라 할 만큼 치열했다. 진로가 ‘길벗’에 6개월간 쏟아부은 광고비는 요즘 돈으로 치면 400억 원을 웃돌았을 것이다. 그런 광고전이 한참 치러진 후, 당시 진로 홍보실의 이병인 홍보담당이사(광고계 원로)와 최학래 부장(前 한겨레신문 사장)이 나에게 광고 효과 측정 용역을 의뢰했다. 우리 조사 결과, 그 효과는 ‘zero’였다. 수백억 대 광고의 효과가 왜 ‘0’이었을까?
첫째, 상표 선호도는 길벗 20%, 베리나인 80%, 둘째, 위스키 M/S, 즉 가장 최근에 마신 위스키 상표(Stomach Market Share)는 길벗 32%, 베리나인 68%였다. 프레젠테이션 장소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장익용 사장과 영업 임원들이 참석했는데 장 사장은 “우리 M/S 자료에 의하면 길벗 45%, 베리나인 55%인데 나는 이 조사를 믿지 못하겠다”며 불쾌해했다. 영업 쪽에서 믿고 있던 그 M/S는 아마도 그들이 유통점에 밀어낸 물량까지 포함한 전표 발행 기준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M/S가 맞다고 하기에는 길벗 상표 선호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나는 우리 조사 결과가 정확함을 자신했다. “광고는 왜 하는가? 상표 선호도 향상에 있지 아니한가!”
그로부터 몇 년 후 진로는 결국 길벗 브랜드를 포기했다. 한때 나와 소주잔을 기울인 적도 있는 이병인, 최학래 두 분이 회사를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며 ‘사실(fact)’을 차갑게 이야기해야 하는 한 조사인으로 인간적 고뇌를 느꼈다.
광고에 많은 돈을 지출하는 광고주 입장에서는 조사를 통해 광고 효과 여부를 정확하게 알아야만 광고나 전략을 수정하고 광고대행사를 교체하는 등의 의사 결정을 제대로 할 수 있다. 반면 광고대행사 입장에서는 무조건 ‘광고 효과 있다’ 내지는 ‘경쟁사보다 낫다’는 결과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야 광고주와의 계약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광고 효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하려면 광고대행사를 통할 것이 아니라 광고주가 제3의 회사에 직접 의뢰하는 편이 낫다는 점을 일러두고 싶다.
조사는 광고 효과를 측정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사전 제작 과정에도 활용된다. 광고 콘셉트에 어울리는 모델 선정부터 시작해 카피나 배경음악 등 갖가지 요소에 대한 반응을 미리 체크해서 최적의 조합을 찾기 위해서다. 이 단계에서 늘 등장하는 쟁점이 있다.
“광고는 예술(art)인가, 과학(science)인가?”
창의적 표현을 중시하는 디자이너나 카피라이터는 광고를 독창적인 예술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오랜 조사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나는 광고를 예술보다는 과학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광고는 측정 가능하고, 경쟁사와 상호 비교함으로써 콘셉트와 표현에 대한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그런 식의 평가가 어려울 뿐 아니라 효용 가치도 크지 않다.
광고에 대한 나의 관심은 사후 광고 효과 측정에서 사전 광고 효과 측정까지 한층 더 나아갔다. 1987년 국내 최초로 TV 광고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을 초 단위로 측정하는 AD-Score 시스템을 개발했다. 실내에 모인 30명에게 TV 광고를 보여주면서 매 순간 마음에 들면 측정기의 (+) 키를, 마음에 들지 않으면 (-) 키를 누르도록 해 반응을 초 단위로 실시간 측정하는 기계식 장비였다. 경쟁사의 광고와도 손쉽게 비교가 됐다. 광고 시안의 미흡한 부분이 어디인지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미국, 일본 비디오리서치에서도 갓 도입했을 정도로 당시로써는 최신 방식이었다.
그러나 광고주 측의 광고부서나 광고대행사 측은 AD-Score 이용을 꺼렸다. 광고 시안 평가가 낮게 나올 경우 광고를 다시 제작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추가 경비 소요 등이 그 이유였다. 결국 꽤 많은 투자로 개발한 AD-Score 시스템은 국내 최초의 시도라는 의미만 남기고 흐지부지 사라졌다. 이후 AD-Score 개발 경험은 효율적인 TV 광고 집행 시간대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피플미터, 즉 시청률 측정 시스템 개발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