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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담(調査談)

한국갤럽, 조사인, 조사 이야기

〈조사인으로 살다〉 국내 첫 선거 예측과 적중
2019/09/04

● 2017년 발행 단행본 〈조사인으로 살다: 박무익 회고록〉에서 발췌

국내 첫 선거 예측과 적중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일 오전 8시. 나의 조사방법론 스승인 이만영 교수가 집으로 전화를 했다.
“朴 형, YS와 DJ 중 누가 지지도가 높나?”
“둘은 막상막하인 것 같은데….”
“될 사람한테 표를 몰아주어야 할 텐데 곤란하군.”

많은 사람들이 군사독재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애썼지만, 오리무중 판세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선거일 전 후보 지지도 등 선거여론조사 결과 보도가 금지된 탓에 각 후보 진영이 흘리는 엉터리 조사 결과들만 떠돌았다. 나는 그에게 우리 조사 결과를 말할 수 없었다. 예측치는 이미 확정해 놓았지만 그날 저녁 발표를 앞둔 입장에서 당일 어떤 사건·사고가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오전 10시, 회사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매캐한 연기가 건물을 온통 뒤덮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보라매공원 유세장의 광기를 목격한 직후부터 며칠간 나는 가뜩이나 긴장한 상태였다.  불이 났다고 하니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선거 예측 결과를 발표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어느 쪽에서 불을 질렀나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니 건물 옆 쓰레기통에서 불이 나 끄는 중이란다. 내가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이날 오후 6시 정각 기자회견을 통해 후보별 득표율 예측 결과를 발표하겠노라고 각 언론사에 연락해두었다. 내 책상 위에는 두 달 전부터 이틀 전까지의 조사를 바탕으로 산출한 예측치가 놓여 있었다. 기호 1번 노태우 34.4%, 기호 2번 김영삼 28.7%, 기호 3번 김대중 28.0%, 기호 4번 김종필 8.4%.

예측 결과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경험 차원에서 출구조사를 했다. 당시 출구조사는 선거법 위반이었다. 하지만 출구조사는 선거일이라는 특수 상황에서만 가능했기에 위법임을 알면서도 감행했다. 전국 1만 3천 6백여 개 투표소 중에서 선정한 245개 투표소에 조사원들을 투입했다. 투표소마다 투표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 중 20명을 선정해 성별, 나이, 투표한 후보 등 3개 항목에 대한 집계 자료를 오전 11시까지 전화로 보고받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나는 원칙을 잘 준수하기만 하면 출구조사에서도 당연히 순위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 믿었다. 다만 오차범위 내에 안정적으로 들어오는지가 관심사였다.

전국 출구조사 집계 결과를 손에 넣은 것은 낮 12시 10분경. 김영삼 28%, 김대중 24%, 노태우 21%, 기타 3%, 무응답 24%. 전날까지의 예측치와는 순위가 뒤바뀐 결과였다. 항상 1위를 지킨 노태우 후보가 겨우 21%로 3위라니, 기가 막혔다. 무응답 24% 속에 여당 후보 지지가 많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예상외로 심한 격차였다.

한겨울 날씨에 식은땀이 흘렀다. 진정하고 생각을 거듭했다. 이 결과는 투표소에서 투표하고 나온 사람들에게서 직접 얻은 것이다. 혹시 분석 방법에 문제가 있었나. 그렇다면 몇 달간 밤잠 설치며 노력한 일이 허사로 돌아간다. 각 지방 실사 담당자에게 출구조사 현장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해 알려달라고 했다. 애초부터 출구조사는 시험적인 것이었다. 일단 출구조사는 잊자.

아직 예측 결과 발표 시각인 오후 6시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한 연구원이 서울만 전화조사를 해서 예측치를 검증하자는 의견을 냈다. 예정엔 없었지만 그 또한 선거일이 아니면 해볼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해 일단 전화조사 준비를 지시했다. 그런 후에야 선거팀과 둘러앉아 당일 투표자 전화조사의 장단점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첫째, 투표를 마치고 외출한 사람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 둘째, 가구 전화 보유율이 70% 선이기 때문에 저소득 계층도 조사에서 제외된다. 셋째, 조사 결과를 집계하고 분석할 시간을 확보하려면 최대 몇 시까지 조사할 것인가도 관건이다.

오후 1시쯤 몇몇 언론사로부터 문의가 왔다. 지금 한국갤럽 명의로 김대중 후보가 1위라는 최종 선거 예측 자료가 팩스로 들어왔다며 사실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했다. 누군가 우리를 사칭한 것이었다. 투표 당일에 자기 진영이 1위라는 사실을 흘리면 유권자들이 김대중 후보에게 표를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하지만 언론 보도는 투표가 끝난 뒤에나 가능한 일이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선거운동도 다 있구나 싶었다.

오후 2시, 평소 친분이 있던 한 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朴 형이 오늘 출구조사를 한다고 했는데 그 결과에도 노태우 후보가 1등이오?”
“글쎄, 그 출구조사 결과가 이상해서 지금 서울 지역에 전화조사로 검증하는 중입니다. 결과는 두 시간쯤 후에나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정오에 받아 든 출구조사 결과의 공포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내 대답엔 힘이 빠져 있었다.

오후 4시 무렵, 서울 지역 투표자 전화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번엔 김대중 후보가 선두다. 출구조사에 이어 투표자 전화조사 결과도 전날 최종 예측 결과와 달랐다. 나는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한계와 문제점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 차이는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때 오전의 출구조사 진행 경과에 대한 보고가 들어왔다. 출구조사에 투입되는 조사원들은 대부분 지방 실사 사무소가 있는 5개 도시에 거주했다. 그런데 우리가 조사 지점으로 선정한 245개 투표소 중에는 새벽에 버스를 타고 가더라도 서너 시간 걸리는 오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사원들이 당일 새벽 투표소에 제때 도착하지 못하거나 아예 가지 못해 200개 투표소에서만 조사가 계획대로 이뤄졌다. 일부 조사원들은 지정한 투표소에 가지 않고 임의로 인근 지역 투표소에서 조사를 진행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출구조사 결과는 완전히 무시하기로 했다. 각 가정에 일반 유선전화도 다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 휴대전화는커녕 오로지 공중전화에 의존해야만 연락이 가능했던 그 시절. 최초로 시도한 출구조사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출구조사의 문제점을 되짚으며 우리는 투표자 전화조사에서도 같은 맥락의 문제점을 발견했다. 오후 6시 예측 결과 발표만을 의식하다 보니 선거 당일 시간대별 투표자의 성향 차이를 간과한 것이다. 자료처리와 분석 시간 확보를 위해 출구조사는 아침 무렵부터 오전 11시까지만 했고, 투표자 전화조사는 점심 무렵부터 오후 3시 반까지만 했다. 오전 출구조사에는 아침 일찍 투표소에 가는 열성 유권자, 투표 후 출근하거나 놀러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오후 투표자 전화조사에는 투표 후 바로 귀가해 집에 머물던 사람들이 주로 응답했다. 결국 선거 당일 투표자 전화조사 역시 무시하기로 했다.

발표한다고 언론에 공언했지만 없던 일로 한다 해서 누구 하나 질책할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간의 안정적인 추세를 지켜보며 발표할 예측치를 확정할 때까지만 해도 확신에 차 있었다. 하지만 선거 당일 출구조사와 투표자 전화조사의 예상외 결과에 흔들렸다. 선거팀의 한 연구원은 조심스레 말했다. “소장님, 우리 회사가 지금도 잘 나가고 있는데 구태여 모험할 필요가 있을까요?” 다른 의견도 있었다. 우리는 충분히 노력했고 그것이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비롯한 선거팀원들은 후자에 더 공감했다. 어차피 누구든 한번은 처음을 겪어야 한다. 성공과 실패는 첫 시도 후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조지 갤럽 박사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무익, 네 몸을 던져보렴. 그 뒤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다면 말일세.”

오후 4시 30분, 아까 전화했던 기자가 또 전화를 했다.
“朴 형,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나는 당일 출구조사, 투표자 전화조사 결과가 전날 예측과는 달리 나온 상황을 전했다.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솔직하지 않은 건가요, 이것 참 곤란하게 됐군요.”
“그래도 발표는 예정대로 할 겁니다.”
“아니, 뭐요? 세 가지 조사가 각각 다른 뒤죽박죽 결과를 얻고도 발표한다고요?”
잠시 침묵이 오간 뒤 그는 이런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朴 형, 당신의 결단과 고독을 이해합니다. 행운을 빕니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2천 6백만 유권자 중 일부는 지금 이 순간에도 투표를 하고 있을 것이다. 내 손에 그 투표 결과 예상치가 들려있다는 상황이 묘하게 느껴졌다.

오후 5시, 언론사 중 첫 순서로 일본 방송사 NHK 기자가 우리 회사를 찾아 왔다. 그는 나에게 TV 방송 사정을 설명하며 예측 결과를 1시간만 미리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다른 언론과의 형평성을 들어 그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했다. 오후 6시 전까지 회사에 온 기자는 모두 8명이었다.

“소장님, 오후 6시입니다.”
비서가 인터폰으로 연락을 해왔다. 나는 기자들 앞에 서서 예측 결과를 소리 내어 읽었다.
“제13대 대선 선거 예측 결과를 발표합니다. 기호 1번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34.4%의 득표율을 기록해 1위가 될 것으로 예상되며, 2위는 민주당의 김영삼 후보로 28.7%, 3위는 평민당의 김대중 후보로 28.0%, 4위는 공화당의 김종필 후보로 8.4%를 득표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2%포인트입니다.”
기자들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못 믿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일부 기자들은 실망하는 표정도 보였다. 발표를 마친 나는 취재하러 오지 않은 언론사에 팩스로 발표 내용을 보내라고 비서에게 지시하고 회사를 나왔다.

NHK 기자는 즉시 일본으로 기사를 송고했다. 오후 7시, NHK는 뉴스를 통해 ‘한국의 차기 대통령은 여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 확정적’이라고 보도했다. 그날 저녁 NHK는 매시간 ‘한국 대통령 선거 노태우 당선 확정적’이란 자막을 내보냈다. 일본 조간신문 요미우리는 우리의 선거 예측 결과를 4단 기사로 보도했다. 반면 국내에서는 어느 언론도 선거 예측 관련 기사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서울신문이 가판에 우리의 발표 내용을 보도했으나 다음 날 아침 배달판에는 삭제되어 있었다. KBS 9시 뉴스의 박성범 앵커는 ‘이런 예측이 있었는데 두고 봅시다’라는 말과 함께 10초도 안 되는 단신으로 처리했다.
 
전국 투표소의 투표함이 닫히고 개표 장소로 옮겨지던 무렵인 오후 7시, 나는 선거팀과 함께 중국집 하림각에서 고량주를 마시며 TV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후 9시 30분, 투표함이 열리고 개표 상황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TV 화면에 갑자기 ‘노태우 52%’란 숫자가 나타났다.
“에잇, 이 자식들! 투표함을 바꿔치기해서 부정 선거했구나!”
술에 취한 이흥철 팀장이 그 장면을 보더니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우리는 노태우 후보가 34.4%라고 예측했는데 개표 과정에서 52%라고 하니 화가 난 것이다. 개표 초기에는 어느 지역 투표함부터 개표하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득표율이 오락가락할 수 있지만, 생애 최대 긴장 속에서 하루를 보낸 우리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빨리 취했다.

밤 12시가 지나면서 개표 결과는 우리 예측치에 가까워졌다. 1위 노태우 후보, 2위 김영삼 후보, 3위 김대중 후보, 4위 김종필 후보. 더구나 7개 지역별 득표율도 예측치와 비슷해졌다. 마치 숫자들이 경주마처럼 레이스를 하며 우리가 예측한 결승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았다. TV 화면에 나타나는 숫자가 하나하나가 아름답게 보였다.

그날 오후 6시 우리가 발표한 선거 예측에 반신반의했던 국내 언론들도 아홉 시간 뒤인 다음 날 새벽 5시엔 모두 수긍했다. 제일 먼저 조선일보가 12월 17일 배달판에 ‘노태우 후보 당선 확정적’이란 제목을 톱으로 올렸다. 이후 모든 언론들이 기사화하면서 한국갤럽에 시선이 집중됐다. 12월 17일 오전, 회사 사무실은 신문사, 방송사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최종 투표 결과는 12월 17일 저녁이 되어서야 나왔다. 1위 노태우 36.6%(예측치 34.4%), 2위 김영삼 28.0%(예측치 28.7%), 3위 김대중 27.1%(28.0%), 4위 김종필 8.4%(8.7%).

조선일보는 12월 18일과 19일 이틀에 걸쳐 우리의 선거 예측 관련 특집 기사를 실었다. 18일에는 우리가 조선일보와 공동으로 10월 20일부터 12월 14일까지 여섯 차례 여론조사 결과를 보여주는 그래프를 공개했다. 그리고 19일에는 나의 인터뷰와 함께 마지막 선거 예측 조사의 성별, 연령별, 직업별 교차집계표까지 제시해 누가 어느 후보에게 투표했는지에 대한 자료와 선거 과정의 전모를 밝혔다.

선거 기간 중 모의투표 결과로 나와 통화했던 금성사 이은준 상무의 전화를 받았다.
“朴 형, 지난번엔 미안했어요. 여론조사라는 게 그토록 정확하다니 놀랐습니다. 우리가 했던 모의투표라는 게 얼마나 실없는 장난이었는지 좀 알 것 같고요. 이제 우리 기업의 의사 결정도 주먹구구로 할 게 아니라 과학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해야 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수고했습니다.”
참 기분 좋은 전화였다.

언론과 달리 선거에 패한 후보 진영이나 그들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조사 결과를 의미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표에 앞서 운동권 학생과 일부 시민들로 구성된 공정선거 감시단이 서울 구로구청에서 차량으로 투표함을 운반하던 것을 투표함 바꿔치기 부정으로 착각해 구청을 점거하고 옥상에서 농성을 벌이다 출동한 경찰과 대치하기도 했다1). 그 와중에 투신한 학생도 있었다.

선거 결과가 거의 확정된 17일 오후, 민주당의 김영삼 후보 진영은 ‘부정 선거 규탄’ 분위기였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는 권력의 제도권 기관이 총동원되어 치러진 구조적이고 원천적인 부정 선거’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영삼 민주당 총재는 ‘생명을 바쳐서라도 정권 타도 투쟁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훗날 여당과 합당한 뒤 제14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평민당의 김대중 후보 측도 ‘부정 선거 시비’ 사례 수집에 몰두했다. 후보 단일화 실패에 대한 책임이 컸던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후보 단일화가 되었어도 부정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대중 총재와 평민당은 두 달쯤 뒤 ‘부정 선거 백서(白書)’를 발간했다. 당시 공정선거운동을 벌인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이번 선거는 컴퓨터 부정 선거’라고 주장했고 평민당도 이에 동조해 부정 선거 백서에 자료를 실었다. 김대중 후보는 제15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듬해 총선에서 국회 의석은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됐다. 유권자들은 후보 단일화 실패가 제13대 대선 결과였음을 투표로 입증했다. 여소야대 국회는 컴퓨터 부정 선거에 관한 국정조사를 했지만 투·개표 과정과 컴퓨터에 무지한 비전문가들이 만든 유언비어로 판명됐다.

나는 제13대 대통령 선거 예측 여론조사에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한다. 첫째, 선거 예측 적중 이후 한국갤럽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조사회사들이 매년 급성장했다. 당시 선거 예측은 ‘조사는 과학’이며, 과학적 접근법을 통해 의사 결정을 할 때 기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신념을 한국의 기업인들에게 각인한 계기가 되었다고 믿는다. 둘째, 선거 기간 중 여론조사는 선거 과정의 공정성을 점검하는 모니터 역할을 하며, 부정한 방법으로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선거 전문가들에게 일깨워주었다는 점이다.

선거 기간 동안 우리 언론이 각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하지 않았던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남겼다. 첫째, 유권자를 갈팡질팡하게 만들어 국민의 힘으로 이루고자 하는 단일화 투표 운동을 좌절케 했다. 둘째, 야당 후보자와 선거 참모들이 선거에 이기기 위한 전략을 효과적으로 전개하지 못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선거 과정을 정책·공약 대결로 이끌지 못하고 흑색선전, 폭력, 지역감정 자극 등 좋지 못한 상황으로 타락시켰다. 또한 장기간 여론조사 공표를 금지했던 당시 선거법은 당선자에게 유리하게, 낙선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63%의 득표를 하고도 정권 교체를 못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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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구로을 선거구 부재자 우편투표함은 개표하지 못하고 봉인됐다. 그 투표함은 29년이 지난 2016년 7월 21일 서울 종로구 선거연수원 대강당에서 개봉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개표를, 국립과학연구소가 투표함 진위 검증을 지원했다. 한국정치학회는 두 달 후인 10월 23일 연구용역 보고서를 통해 구로을 우편투표함이 조작되거나 위조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