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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담(調査談)

한국갤럽, 조사인, 조사 이야기

〈조사인으로 살다〉 정치지표 조사 시작
2019/09/04

● 2017년 발행 단행본 〈조사인으로 살다: 박무익 회고록〉에서 발췌

정치지표 조사 시작
- 30년 전과 다름없는 정치권과 언론의 여론조사 오독(誤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출 전까지 우리나라 대통령은 다섯 명에 불과하다. 그들 중 재임 기간이 1년도 안 되는 윤보선, 최규하 대통령을 제외하면 거의 40년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세 사람이 우리나라를 통치했다.

정치 체제는 단기간에도 바뀔 수 있지만, 문화 체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 땅에 500년간 지속된 조선왕조 문화는 일제 강점기를 관통해 해방 이후에도 잔존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 초기 지방 순시차 경기도 수원을 들렀을 때, 그 지역의 많은 촌로(村老)들이 하얀 한복을 입고 길에 나와 엎드려 있었다는 일화는 정치 체제보다 문화 체계의 지속성이 강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습성은 정치 문화에도 남아 집권자들 대부분이 왕조시대 임금처럼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선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원칙 하에 1인 1표제로 치러졌지만, 일단 당선된 사람은 유세 중 유권자들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한 표를 호소했던 후보 시절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돌변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은 당선 직후부터 개인의 주장이나 정책 등을 국민 승인 없이 추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부지불식간에 대통령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자로 생각하게 만들었고, 투표 때마다 후보자의 정견보다 출신지나 학연 등이 더 크게 부각되는 악순환을 낳았다.

한국갤럽은 1980년대 초에도 문화공보부, 정당, 현대사회연구소, 한국일보, 매일경제 등의 의뢰로 정치·경제 의식 조사를 했다.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 국회의원 선거, 국가와 역사, 법 인식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지만, 서슬 퍼런 제5공화국 체제 하에서 현직 대통령의 잘잘못을 묻는 질문까지 하려는 클라이언트는 없었다.

나는 1987년 직선제로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한국에서도 정치조사가 가능함을 비로소 확신하게 됐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단단한 기반 위에 서기 위해서는 각 정치 과정 단계의 공개, 즉 대통령 직무수행평가와 정당 지지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 주요 정책에 대한 찬반 등을 보여주는 정치지표(Political Index) 조사를 도입하는 일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위해 나는 주요 언론사들에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정치지표 조사를 최소 연 4회 할 것을 제안했다.

첫째, 역대 대통령은 당선 직후부터 개인의 의지대로 정책을 추진하는 경향이 많으므로 이런 경향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 정기적으로 대통령 직무평가를 공개하면 그 결과가 부정적일 때 집권자가 이를 만회하기 위한 ‘대안(代案) 정책’을 강구하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 정치에 필수불가결한 시스템으로 의미가 있다.
둘째, 타 신문과 차별화되는 편집이 가능하다. 현재 우리 언론은 정치적 이슈에 대해 형용사나 부사를 동원하여 지면을 꾸미고 있으며 사설이나 칼럼 등을 통해 당위론(當爲論) 위주의 편집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이른바 ‘정밀 저널리즘(precision journalism)’과 거리가 멀다. 만일 정부가 국민의 여론과 거리가 먼 정책을 밀고 나가면 형용사나 부사 위주로 비판하기보다는 ‘이를 반대하는 국민이 70%’라는 식의 계량화된 여론조사 수치를 제시하는 것이 정부를 설득하는 데 훨씬 합리적일 것이다. 정확한 여론조사 수치를 인용한 정부 비판 기사는 종래의 선동형 비판 기사와 질적으로 다른 면모를 가져다줄 것이다. 현재 정치지표 조사를 정기적으로 하는 언론사가 없기 때문에 독보적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 곳은 조선일보였다. 1988년 7월 국내 최초로 조선일보-한국갤럽 공동 브랜드 하에 정치지표 조사를 시작했고, 이후 20여 년간 지속했다. 정치지표 조사 도입 초기 몇 년간 한국갤럽은 평온하지 않은 나날을 보냈다. 당시는 소위 3김(金) 시대, 다수당이 경쟁하는 체제였다. 노태우 대통령 직무수행평가, 정당 지지도, 3김 등 주요 정치인 호감도 조사 결과를 발표할 때마다 시시비비(是是非非)가 일었다.

제1차 조사에서는 집권 여당인 민정당이 1위로 나타나 그들 나름대로 정통성을 확보했다며 좋아했다. 제2차 조사에서는 민주당이 1위로 부상했다. 조사 결과가 민주당보에 실렸고 정치 자금이 민주당으로 흘러가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제3차 조사에서 평민당이 1위를 차지하자 이번에는 기업들이 그 당으로 몰려갔다. 제4차 조사에서는 3김 중 김종필 총재의 호감도가 가장 높게 나타나 공화당 쪽에서 환호하는 식이었다. 사실 요즘 같았으면 여론조사의 오차범위를 감안할 때 각 정당 지지도는 비슷한 수준이라고 강조했을 테지만, 신문지면은 그러한 부연 설명까지 실어줄 만큼 넉넉하지 않았다. 정치권도 각자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데 급급했다.

조사가 거듭되면서 각 정당의 우열이 가려지기 시작했다. 여당인 민정당에 대한 여론은 노태우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한동안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집권 2년 반이 지나면서 3당 합당과 레임덕(lame duck) 현상이 겹쳐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처음 2년 동안 정당 지지도에서는 민정당이 1위를 차지한 때가 많았다. 가끔은 제1야당인 민주당이 1위에 올랐고, 드물긴 하지만 평민당이 1위가 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조사 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1위 정당은 한국갤럽에 찬사를 보낸 반면, 2~3위 정당에서는 여론조사 자체에 문제를 제기했다. 때로는 열혈 당원들의 공갈 협박에 가까운 전화 공세에 시달리기도 했다.

정치지표 조사 초기에 겪었던 여러 사건들 중에서는 1991년 11월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조선일보가 제9차 정치지표 조사1) 결과를 11월 1일 1면에 싣고, 11월 4일 3면에 ‘국민과 따로 노는 정치’라는 제목의 사설로 한 번 더 다룬 것이 문제가 됐다. 당시 조사 결과는 ‘노태우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는 응답이 15.2%, 취임 후 최저 수준이었다.

이전 정부들이 강성(剛性)이었다면, 노태우 정부는 상대적으로 연성(軟性)이었다. 사회 곳곳에서 불거져 나오는 각종 분규에 노태우 정부는 강한 공권력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타협이나 협상을 시도하려 했다. 정부 출범 직후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는 여론이 연성 정부에 대한 기대감 충족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집권 후반기를 맞아 인기가 추락한 것은 지나친 연성화에 대한 반감(反感) 때문일 수도 있다. 오죽하면 노태우 대통령의 별명이 ‘물태우’였을까. 그럼에도 노태우 정부 역시 오랫동안 내려온 권위적인 정치 문화의 프리미엄을 누렸다. 특히 시민단체나 운동권이 아닌 정치적 헤게모니와 거리가 먼 기업인들에게는 역대 정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일보에 실린 우리 조사 결과에 청와대가 반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처음에는 어떤 후폭풍이 몰아칠까 노심초사했다. 혹시라도 직원들이 동요할까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혼자 지나온 과정을 곰곰이 되새겨 봤다. 나는 결코 잘못한 것도 없고, 후회할 일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마음은 담담해졌다. 며칠 뒤 청와대의 한 관계자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제9차 정치지표 기사가 보도된 직후 당사자인 노태우 대통령이 직접 수석비서관을 불러 화를 내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질책했고, 그 자리에서 한국갤럽에 대한 ‘조치’까지 검토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참모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한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갤럽은 각하의 당선을 예측했던 조사회사인데 악의적으로 수치를 낮게 조작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염홍철 당시 대통령 정무비서관이 조선일보에 기고문 형식으로 글을 실었다. 그는 대통령 직무 평가 조사에서 ‘보통이다/어느 쪽도 아니다/무어라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유보적 응답도 긍정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요지의 반론을 개진했다. 이에 대해 우리 연구원들이 조선일보 독자란에 반박하는 글을 투고하는 등 지면(紙面)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처음 우려와 달리 정치적 보복이라 생각되는 일은 없었다. 이후로도 우리는 공보처 등 정부 의뢰 조사를 계속했다.

한국갤럽은 1980년대 중반까지 연구자들이 의뢰하는 학술 연구 목적의 조사나 일반 기업의 마케팅조사를 주로 했다. 클라이언트 중에는 국내에 진출했거나 진출하려는 외국계 회사가 많았다. 학술용 조사 결과는 소수의 학자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공유됐고, 마케팅조사는 대부분 기업 내부 자료로만 활용됐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조사해서 공표했던 내용은 사회, 문화, 경제, 생활과 밀접한 것들이라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결과 그 자체가 논란이 된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1988년 정치지표 조사를 시작하고 민감한 정치 사안에 대한 조사 결과를 자주 내놓으면서부터 구설에 휘말리는 사례가 늘었다. 일부 지식인들은 여론조사가 국민 여론을 오도(誤導)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갤럽이 일부에서 의심을 받고 있다. 최근의 민감한 정국 상황에서 갤럽이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라고 때맞추어 내놓는 것들이 민심의 반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집권 정당의 정국 운영을 충실히 뒷받침해주는 자료로서 기여할뿐더러 ‘호도’, ‘왜곡’, 심지어 ‘조작’되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적 시각들이 바로 그것이다.”
“조사가 의도했든 안 했든 그 여부를 떠나서 갤럽이 객관성, 과학성으로 포장된 여론조사를 통해 결과적으로 군부독재 체제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한 점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위 인용문의 출처는 내가 즐겨보던 잡지 <샘이 깊은 물> 1989년 6월호다. ‘군부독재’라는 단어만 빼면 2017년 지금 여론조사를 향한 질책이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조지 갤럽 박사는 일찍부터 그러한 비판을 묵묵히 견디는 것 또한 조사인의 숙명이라 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몹시 억울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담담해졌다.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고,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이후 나는 여론조사와 관련해 언론 인터뷰 요청이 오면 한국갤럽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담은 기사를 복사해 주며 참고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실상 여론은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거짓도 아니다. 다만 의도적으로 작위(作爲)된 것을 여론이라고 호도(糊塗)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점이 큰 문제다. 여론은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둥글게, 또 모나게도 된다. 물은 한없이 잔잔하다가도 바람을 타면 이쪽저쪽으로 흔들린다. 성난 야수처럼 높은 파랑(波浪)을 일으키다가도 단숨에 가라앉기도 한다. 우리 정치사를 되돌아보면 일부 정치학자나 ‘정치 기술자’들이 겉으로는 여론을 존중하는 듯하지만 철저하게 여론을 무시하고 조작하려 든 경우가 없지 않았다.

여론조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결과가 자신들에게 유리하면 치켜세우고, 불리하면 엉터리라고 깎아내리기 일쑤다. 언론은 여론조사의 품질을 따지지 않고,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될 만한 결과만 좇는다. 지켜보는 국민은 혼란스럽다. 조사인 입장에서는 허탈할 때가 많다.

민주 정치와 여론조사의 관계에 관해 영국의 윌슨(Harold Wilson, 1916~1995) 수상이 남긴 말을 상기해 보자.
“정치가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여론조사에 관심을 가져라. 단 맹목적으로 존중하지 말 것이다. 질문의 방법과 응답 내용을 잘 음미하라. 조사의 결과가 발췌, 생략, 수정 중 어느 유형이든 간에 그것을 발표하는 편집자 또는 경영자는 한 편으로 기울어진 견해에 좌우됨 없이 공정하고 솔직하게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여론조사는 민주적인 결정 과정에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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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1년 9월 30일부터 10월 28일까지 전국(제주도 제외) 만 20세 이상 남녀 1,500명 면접조사 결과로, 노태우 대통령 임기 4년차 4분기 직무평가 기록이다.